오랜만에 국내 매거진과 화보를 촬영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드라마 <이두나!>를 한창 찍고 있어요. 일주일에 4~5일씩 지방에 내려가 촬영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연기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원래 작품에 임하는 동안에는 양세종이 아니라 제가 맡은 인물이 되려고 애쓰는 편이거든요. 이번에도 <이두나!>를 위해 양세종의 일상을 일부러 단순하게 만들어놓았어요.
극 중 인물을 잠시 벗어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복싱 할 때요. 전역 이후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해본 운동 중 제일 재미있더라고요. 복싱을 하면 제 안의 무언가를 털어내는 기분이 들어요. 미트를 팡팡 칠 때의 쾌감이 좋고, 반사 신경 향상에도 도움이 돼요. 촬영이 없는 날이면 늘 복싱장으로 향할 정도로 요즘 푹 빠져 있어요. 쉬고 싶어도 체력을 관리해야 하니 무조건 가요. ‘다음 주를 위하여’ 하는 생각으로요.
평소 계획적인 편인가요? 왠지 MBTI 성격유형 중 판단형(J)에 속할 것 같은데요. 전 인식형(P)이에요. MBTI 검사를 세 번 해봤는데, 처음과 마지막 결과가 ISTP였어요. 다른 한 번은 ESTP였고요. 고등학생 때 한 첫 검사에서는 외향형(E)과 내향형(I)이 거의 반반씩 나왔어요.
스스로 보기에는 외향형과 내향형 중 어디에 더 가까워요?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외향형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당시에 비하면 내향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하다 보면 인물에 따라 외향적인 면을 보여줘야 할 때도 있잖아요. 이럴 땐 저를 작품 속 인물과 비슷하게 만들어놓으려 해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음악을 듣는 거예요. 촬영 준비를 하거나 대본을 읽으면서 인물과 어울리는 음악을 줄곧 틀어놓는 거죠. 이번 작품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촬영 중이에요.
2019년에 방송한 드라마 <나의 나라> 이후 오랜만에 촬영장으로 돌아왔죠. <사랑의 온도> 조명 팀에 있던 형님을 <이두나!> 촬영장에서 5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촬영이 몇 회차 진행되었을 때 그분이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세종아, 너 늙었다.” 그런데 스스로 봐도 제 얼굴이 조금 달라지긴 했거든요.(웃음) 그래서 최근에 반신욕이랑 마스크팩을 꼭 하고 자요. 화장품 바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영상도 찾아서 보고요. 원래 관심이 거의 없던 분야였는데, 매일 노력하니 확실히 좋아지더라고요. <이두나!>에서 맡은 인물이 대학생이라는 점도 열심히 관리하는 이유예요. 이런 식으로 캐릭터가 되어가는 과정을 거치고, 촬영장에 작품 속 환경을 구현하고, 대본에 빠져 살다 보니 모니터에 보이는 제 모습이 진짜 대학생 같더라고요. 다행이다 싶었어요.(웃음)
작품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니면 철저히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작품의 세계에 이토록 깊이 몰입하는 이유가 있나요? 현장에서 약간 여유가 있어야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촬영 전에 혼자 부단히 연습하며 연기를 체화하고, 현장에 가서는 오감을 열어놓아요.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각 장면을 만들어가죠. 현장에서 합을 맞출 때 예상치 못한 것들이 나타나는 순간을 좋아해요. <이두나!> 촬영장에서도 이런 순간을 자주 맞닥뜨려요. 다 함께 즐겁게 촬영 중이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두나!>는 지나온 20대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대학생 시절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치열했어요. 연기 열정이 큰 동기들이 있었거든요. 수업이 끝나 집에 간다던 애들이 연습실 조명을 환히 밝힌 채 밤을 지새우고 있더라고요. 저도 동기들과 서로 배우며 성장하고 싶었고, 연기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잠을 줄여가며 연습했어요. 가끔은 같이 막걸리 마시고 통기타 치면서 놀기도 했는데, 각자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말다툼을 한 적도 있어요.(웃음)
치열함은 지금도 그대로인가요? 가치관이 조금 바뀌었어요. 어릴 땐 ‘잘해야지’ 하는 일종의 경쟁심이 있었다면, 배우로 데뷔한 이후 제가 돋보이기를 기대하며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거든요. 제가 맡은 인물에 잘 녹아들고 그의 생각과 감정, 상황을 오롯이 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연기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나요? 제가 작품 속 인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 말할 수 없이 짜릿해요. 누군가와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사람의 면면이 저한테 자연스레 투영되잖아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기도 하고요. 인물에 따라 계속 바뀌겠지만, 결국 저의 심지를 단단히 세우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생각에 다다랐어요.
작품이 끝나면 본연의 모습으로 잘 돌아오나요? 예전에는 쉽지 않았어요. 작품이 마무리될 때마다 여행을 떠나 연락이 뜸하던 지인들과 통화하고, 미뤄뒀던 영화랑 책도 보고, 틈날 때마다 걸으면서 ‘나는 누구지?’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저로 돌아오게 되더라고요. 자신을 재정비하고 새 인물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배우의 책임으로 느껴져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죠. 맞아요. 수개월을 같이 보낸 인물이니까요. 그동안 연기한 인물들의 정서가 어느 정도 저에게 묻어 있고, 지금도 쌓여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지나온 인물들의 흔적을 굳이 지워내려고 하지 않아요. 그 흔적이 남아 양세종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요.
한동안 함께한 작품을 떠나보낼 때면 어떤 기분이 들어요? 허해요. ‘현장의 기억, 연기하던 순간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어느 날 갑자기 눈물을 쏟은 적도 있죠. 작품을 함께 만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를 마무리하며 한석규 선배님에게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어요. 어쩌면 제 인생에서 선배님을 만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랬더니 선배님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그래” 하시더라고요.
정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아주 많아요. 관계를 쉽게 끊어내지 못하고, 단호히 돌아설 때도 있지만 그래야 한다는 확신을 다지는 과정이 참 어렵죠. 최근에 지인들에게 밥 한 끼 사는 취미가 생겼어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가서 이야기를 들어줘요.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어?’ 하고 공감하고 알아주는 말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어요. 연기할 때도, 일상에서도 내가 말하는 것보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세종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누구에게하나요? 저는… 제가 믿는 친구들, 형들한테 하는 것 같아요.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들한테는 제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어요. 함께한 시간이 많이 쌓였고, 서로에게 솔직한 동시에 존중과 배려를 잃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상황에 맞는 이야기만 하려 하고,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껴요. 알아도 모르는 척, 모르면 더 모르는 척하는 거죠.
언제 생긴 태도인가요? 현장에서 연기하다 보면 가끔 낯선 감정을 느껴요. 그럴 때 ‘이건 내가 양세종으로서 알게 된 감정인가? 아니면 인물의 내면이 너무 깊어 내가 미처 들어가지 못한 지점이 현장에서 발현된 걸까?’하는 고민을 하게 돼요. 그런데 모니터를 살펴보니 제가 처음 보는 눈빛과 표정을 짓고 있더라고요. 저 자신에게서 생경함을 발견하는 그 순간에 많은 걸 배우고 성찰하게 돼요. 연기를 통해 몰랐던 감정들을 알아갈 수 있어 신기해요.
즐거우면서도 지난한 과정일 거라 짐작해요. 그럼에도 연기를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등학생 때부터 연기만을 바라보며 달려왔어요. 입시 준비, 대학 공부, 오디션, 첫 작품 등을 거치고 군대에서도 연기 생각만 하다보니 10여 년이 훌쩍 지나갔죠. 이런 제가 연기 이외의 일을 한다면,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연기할 때 제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전역 후 새 작품으로 복귀할 준비를 하는 지금, 또 다른 출발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시점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아요. 또 다른 출발선도, 이전의 연장선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기에 대한 변함없는 태도로 해 온 모든 작품이 제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