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희 데님 스냅 버튼 점퍼와 데님 밴딩 와이드 팬츠 모두 델라라나(Della Lana), 안에 입은 데님 재킷 리바이스 (Levi’s), 실버 이어링 이에르로르(Hyeres Lor).
김용지 블랙 레더 크롭트 재킷과 블루 스트라이프 타이 셔츠 모두 렉토(Recto), 워싱 데님 진 팬츠 골든구스(Golden Goose), 실버 이어링 이에르로르(Hyeres Lor).

 

주인공 ‘이나’는 미혼모다. 전도유망한 DJ였던 그는 음악을 그만두고 홀로 아기를 낳은 뒤 위탁 가정에 맡긴다. 엄마 신‘ 애’(윤유선)가 딸이 홀로 아이(지한)를 키우는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나는 콜센터에 다니며 아이와 함께 살 방법을 궁리한다. 그렇게 꿈을 내려놓고 현실에 발붙이고 살려던 이나에게 다시 음악을 시작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엄마는 교회에 동행해주는 그저 평범한 딸을 원할 뿐, ‘사탄의 음악’을 하는 딸을 원치 않는다며 말리고 모녀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는다. 영화 <둠둠>은 현실과 꿈 사이, 엄마와 딸 사이 누구나 한번쯤 마주했을 갈등 속에서 시작한다. 극적인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나는 음악을 믹싱 하듯 고난을 삶 속에 섞고 소화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나의 곡을 만들어 간다. 그 중심에 테크노 선율이 흐르는 건 필연이었을까? 테크노는 1980년대 중반 무분별한 개발로 가난과 범죄 등 온갖 문제가 들끓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 위해 태동한 장르다. 테크노는 기쁨, 슬픔 등 특정한 감정으로 리스너를 압도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철학적 사고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영화 <둠둠>에선 이나의 고충, 엄마의 아픔, 현실과 꿈, 성공과 실패 등 삶의 여러 층위가 테크노 비트에 맞춰 쪼개지고 합쳐지며 분출된다. 이 혼돈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 자신만의 리듬에 집중하고 기꺼이 몸을 맡기는 일이다.

 

 

<둠둠>이라는 영화 제목이 직관적이라 한 번 들으니 잊히지 않았어요.

정원희 테크노의 기본 비트를 의성어로 나타난 거예요. 그와 동시에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주인공 이나의 심장이 마구 뛰는 걸 표현한 중의적 의미도 있어요.

 

이나의 헤드폰을 통해 울리는 진동, 엄마 신애가 두려워하는 지진의 진동. 영화 속에서 진동은 줄곧 극의 주요 요소로 등장해요.

정원희 영화 <둠둠>은 불안에서 출발했어요. 사람이 불안을 느끼면 심장도 빨리 뛰고 정신이 없어지죠. 이런 상태를 테크노 음악의 잘게 쪼개진 비트로 표현하고, 더 커다란 진동인 지진과 연결한 거예요. 불안이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영화 속에서 관객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한편 지진은 신애와 이나의 화해를 상징하기도 해요. 지진이 나자마자 이나가 신애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거든요. 이 둘의 관계가 해피엔드는 아니지만, 지진을 느끼기 전과 후에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 중요해요.

 

신애는 이나에게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발언을 하거나 집에 대피소를 만드는 등 엄마로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보여요. 신애와 이나의 관계가 미디어에서 그리는 전형적인 모녀 관계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데, 그래서 오히려 현실처럼 보이기도 해요.

정원희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히는 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 영화가 모녀 관계에서 시작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가장 사랑해야 할 엄마가 나를 힘들게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어요. 유독 많은 여성 관객이 이나와 신애의 관계에 집중해서 보는 이유일 수도 있죠. 억압된 시대를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왜곡된 시선이 보이는 거죠. 이와 반대로 엄마 입장에선 자신의 삶을 토로할 상대는 딸 하나뿐인데 하필 사탄의 음악이나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웃음) 모녀가 갈등을 온몸으로 겪으며 나아가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김용지 신애와 이나가 세대 차이나 여러 가지 문제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느 모녀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그런 감정이 낯설지 않았어요. 다만 저와 이나의 성향이 많이 다르다 보니 연기할 때 이나의 심리 상태에 공감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이주민 ‘카니타’(베스티)와 이나는 극중에서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지만, 둘이 함께 있는 장면 그 자체로 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정원희 카니타라는 캐릭터를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는 아이를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신애의 심부름을 하죠. 교회 사람들이 제 잇속을 채우는 걸 뻔히 알면서도 되레 그들이 착하고 순수하다고 뇌까릴 정도로 세상 물정에 밝은 편이에요.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이나를 위로하는 인물은 카니타뿐이에요. 카니타도 이나처럼 아이와 떨어져 타국에서 일하는 처지에 놓여 있죠. 겉으로만 봐선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이나와 카니타는 아이를 향한 그리움, 생계에 대한 불안 등 내밀한 정서를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어요. 이를 통해 나와 가장 먼 것 같은 존재가 나를 가장 많이 위로해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나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베를린에 갈 수 있는 컴페티션에 도전해요. 그런데 결국 지진으로 무산되고 말죠. 베를린까지 가는 상황을 그려보기도 했나요?

정원희 엊그제 열린 시사회에서 한 관객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끝나서 영화가 더 좋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나의 삶에서 무언가 완전히 변하거나 해결된 것이 없을지라도 여러 상황을 겪은 후 마음가짐만큼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김용지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 이나가 (컴페티션에서) 1등을 하고 신난 상태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다고 느꼈어요. 그 결과가 어찌 됐든 지진으로 엄마와 이나가 서로를, 자신을 알게 되는 좋은 계기였으니까요.

 

이나 역으로 김용지 배우를 떠올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원희 첫 미팅 때 김용지 배우가 하얀 옷을 입고 왔어요. 그 옷보다 더 하얀 얼굴로 해사하게 웃는 모습에서 성격이 매우 밝은 사람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죠. 저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배우를 캐스팅할 때 극 중 인물을 배우에게 대입해보곤 해요. 용지 씨는 이나와 공통점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로 묘사된 이나를 뛰어넘어 훨씬 복합적으로 연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용지 배우에게는 이 영화에 참여한 연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김용지 ‘나라면 어땠을까?’ 마음속으로 질문하며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이나가 삶을 사는 방식이 저와 많이 달라서 처음에는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런 인물을 연기할 때 나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 궁금하고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또 여러 번의 미팅을 거치며 감독님이 제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이나와의 공통점을 콕 짚어주셔서 그 부분을 좀 더 꺼내보기로 했어요.

정원희 예를 들면, 이나가 엄마와 싸우거나 민기(김진엽)와 다투는 장면에서 용지 씨와 이나의 접점이 보였던 것 같아요. 밝은 모습 이면에 감춰진 이나처럼 강단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배어났거든요.

 

재킷과 팬츠, 화이트 스니커즈 모두 메종 마르지엘라 (Maison Margiela).

 

촬영 현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은 언제인가요?

김용지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을 찍던 때였어요. 이나가 느끼는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그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리허설을 오래 해야 했어요. 새벽녘의 촬영장에서 윤유선 선배님과 감독님 저 이렇게 세 사람이 굉장히 오랜 시간, 여러 차례 반복하며 촬영한 장면들이 잊히지 않아요. 감독님이 평상시에 제가 유지하는 높은 텐션을 낮추기 위해 애를 많이 쓰셨죠. 윤유선 선배님을 비롯해 박종환 배우, 오원 배우 등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의 합이 좋아서 현장에 항상 즐거운 에너지가 넘쳤거든요. 아주 어두운 감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에요.

 

여러 음악 장르 중에서 테크노를 주요 소재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정원희 테크노를 들으면 다른 장르에 비해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는 점이 좋았어요. 이 음악은 리스너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사고를 철학적 영역까지 끌어올리는 데 도움을 주죠. 테크노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는데 반문화적 의미부터 현재의 댄스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영역을 넓혀왔어요. 이런 테크노 비트에 한 인물의 이야기를 녹여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시작했죠.

김용지 저 역시 이 영화를 계기로 테크노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어요. 감독님이 추천해주신 테크노 DJ의 영상과 음악을 꽤 많은 시간 동안 보고 들었죠. 한편으로 테크노를 트는 클럽에서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이들 사이에 어떤 문화가 있는지 유심히 관찰했어요. 지금은 자연스럽게 테크노 문화의 일원이 된 것 같아요.

 

테크노의 빠른 비트와 흐름에 맞춰 감각적으로 편집된 영상에서 마치 DJ가 여러 음악을 믹싱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정원희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디제잉을 어떻게 연출할지 우려가 컸어요. DJ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퍼포먼스도 별로 없으니까요. 하지만 음악과 인물의 감정이 하나로 흐르게 만드는 데 집중하니 자연스럽게 현재의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요. 음악을 좀 더 임팩트 있게 전달하기 위해 영화의 컷을 많이 나누고 롱 테이크로 촬영한 신도 거의 없죠.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이니만큼 사운드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정원희 어떤 음악 감독과 함께해야 할지 정하는 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보통 영화음악을 주로 하시는 분들은 테크노와 디제잉에 대해 전문 지식이 많지 않거든요. 여러 뮤지션을 찾다가 하임 님의 영상을 보고 매우 인상적이어서 연락했어요. 하임 님은 시나리오가 꼭 자기 얘기 같다며 흔쾌히 응해주셨죠. 또 이나와 민기의 음악이 두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극명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이나의 곡은 하임 님이, 준석의 곡은 이디오테잎의 제제 님이 맡아주셨어요. 두 분의 조언을 반영해 극 중 인물들이 사용하는 장비, 프로그램까지 꼼꼼하게 세팅했죠.

 

이나가 본선에 진출해 플레이한 곡이 아주 강렬했어요. 지안의 웃음소리, 신애가 흥얼거리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의 노랫말 등이 중첩되며 마치 이나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정원희 비로소 이나가 자신만의 곡을 완성한 장면이기 때문에 강렬하게 연출하고 싶었어요. 이나의 곡에 엄마의 노래가 삽입되고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지진 소리와 함께 폭발하는 듯한 굉음으로 들리도록 수차례 공들여 작업했어요.

김용지 저는 그 곡을 듣고 나서 이나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어요.

 

이 인터뷰가 실린 <마리끌레르>가 발간될 무렵 극장에선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거예요. 관객이 <둠둠>을 어떻게 보길 바라나요?

김용지 영화가 주는 메시지나 결말에 집중하기보다 이나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겪어봤을 법한 갈등이 등장하는 만큼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이나가 그 문제를 마주하는 방식대로, 러닝타임을 즐기셨으면 해요.

정원희 누구나 각자 꿈꾸는 바가 있잖아요. 이나가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따라가다 보면 공감되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환경이 바뀌길 바라기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본인의 삶도 기꺼이 응원하게 될 거예요.

 

개인적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나요?

정원희 어떤 일을 할 때 무엇을 좇아야 하는가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어려운 문제죠. 생계를 위한 일에 대한 고민은 특히나 요즘 같은 시대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고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봐요. 그게 상업적이든 그렇지 않든 마음가는 대로 그저 흘러가보세요. 무언가를 선택할 때 조건을 따지기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르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용지 지금 제가 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고 가장 재미있는 일이에요. 제가 움직이는 원동력은 재미에 있어요. 제 성향상 흥미를 체화하고 계속해나가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어느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그 힘이 지속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하며 마음속에 품었던 대사를 꼽는다면요?

정원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김용지 (베를린에) 가든 안 가든 도망치진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