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월 7일, ‘미확인’ 미스터리의 실체에 다가가는 추적극이자 모험담인 넷플릭스 시리즈 <글리치>의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처음 대본을 읽던 날을 기억해요? 이 이야기의 무엇이 배우를 끌어당기던가요? 제가 맡은 ‘지효’는 외계인을 봤다는 것이 실제 경험인지, 환상인지 헷갈려 하는 인물이에요. 어느 날 남자 친구의 실종을 계기로 그의 흔적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사람이고요. 처음에 대본을 4부까지 읽었는데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내가 이 상황을 믿을 수 있는가?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내내 생각했어요. 몇 개의 단어로는 규정할 수 없는, 무채색인 동시에 형형색색의 빛이 느껴지는 글이었어요. 어떤 장면에서는 조금의 빛도 느낄 수 없다가도 어느 기점에 들어서면 세상의 모든 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조금 추상적이죠?(웃음)
추상적이지만 아름다워요. 이 이야기에 기꺼이, 풍덩 뛰어들고 싶었다는 말로 들립니다. 맞아요. 흥미로웠던 건 지효라는 인물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거든요. 한데 그가 평범에 집착하는 건 자신이 평범하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발현되는 행동이에요. 외계인을 본 적 있다고 추측되는 어떤 기억, 현재의 인식 때문이죠. 이 모순적인 상태가 극적으로 다가왔어요.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지효의 모험은 혼자서 시작하지만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친구와 동료가 생겨요. 홀로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부딪치고 어우러지면서 자신의 우주가 확장되죠. 그 과정이 보이고요. 첫 대본에서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알 수 없지만, 모험의 끝에 당도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지만 무작정 나서고 싶었어요.
지효를 연기하며 모험하는 자의 용기와 담대함에 대해 생각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모험하는 사람의 마음에 감정이입한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모두의 인생을 제가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항해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과정을 여행이라고 여기고요.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늘 모험을 떠나는 일인 것 같아요.
매 작품마다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죠? 조금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때도 있거든요. 이 산업 안에 들어와 드라마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충분히 체험했고, 많은 사람이 어떤 열정과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아가 배우로서 역할을 만나고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저 나름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건 오해와 오판이었어요. 새로운 작품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틀이 계속 깨지는 걸 느껴요. 내 룰은 룰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죠.(웃음) 그렇게 깨지면서 매번 모험을, 도전을 시작하는 것 같아요. 어떤 날에는 이 모험이 벅찰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이 끝나고 밀려드는 쾌감과 성취감에 다시 기운을 차리고 용기를 내고요.
용기에는 불가피하게 외로움과 고독이 따르죠. 혹자는 무모하고 무용하다 여길 것에 혼신을 다하는 이의 고독 역시 지효가 가졌을 감정이고요. 이 마음에 어떻게 다가가고자 했어요? 한데 고독이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요. 오로지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이 자신을 직면하는 기회인 것 같거든요. 반드시 필요한 시간인 것 같고요. 모험은 오직 자신의 믿음과 선택으로 떼는 걸음이잖아요. 내가 내 몸을 움직이지 않는 이상 누가 나서서 밀어주지 않고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두 걸음 걷다 보면 길이 보이고, 그 길 위에서 동료를 만나 손을 잡게 될 거예요. 지효가 그랬듯이. 중요한 건 첫걸음을 뗄 때만큼은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응원하고 싶어요. 모험의 시작, 그 순간만큼은 이 사람의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하겠구나. 지효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봤을 때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모험일 수 있죠. 하지만 이 친구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다 내딛은 첫발이거든요.
어드벤처, 미스터리, SF 등 다양한 장르적 재미가 뒤섞인 이 예측 불허한 이야기를 거치며 배우는 무엇을 얻었나요, 혹은 덜어냈나요? 지효는 안전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믿음과 신념을 두루뭉술하게 덮어놓고 살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어느 순간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애써 구축해놓은 평범을 내던지죠. 그 결단의 결과가 누군가에게는 대단하지 않아 보인다 하더라도 그건 남들의 판단일 뿐이고, 지효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게 돼요. 인생을 걸고 부딪혀보는 마음에 대해 배운 것 같아요. 거창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긴 신념과 가치관 등 익숙한 것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도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길에서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변화한 인생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지효가 알려준 것이 많네요. 지효를 만나고 생긴 습관이 있어요. 어떤 감정을 느끼면 이에 대해 노트에 써봐요. 이런 기분을 느꼈는데,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기분의 실체가 궁금해서요. 결론은 없어요. 그 글을 다시 읽어보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나라는 사람에 대해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한 행위에서 떨어져 객체가 돼 나를 보듬어줄 힘이 생겨요. 기분과 상태를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한 번 더 정리하고, 잘 보관하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나를 대하는 아량이 넓어지기도 하고요.
감정을 정리하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배우로서 가진 것에 대해 새삼 알아차리기도 하나요? 나라는 재료에 대해서요. 이상한 믿음인데요. (웃음) ‘나는 아주 광활한 재료를 가진 사람이다’ 하고 믿어요. 신선한 재료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싶어요. 내 쪽에서 먼저 ‘나는 파프리카야’ 하고 규정하지 않은 이상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게 나를 열어두고 싶어요.
신선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뻔한 말일 수 있지만, 결국 사랑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음이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요. 마음보다 더 귀한 게 뭐가 있을까 싶어요. 한데 이 마음은 어떤 순간에 굉장히 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여리기도 한 터라 다치고 싶지 않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덜 쓰는 순간도 있을 거예요. 어느덧 익숙해져 마음이 무뎌지는 순간도 오고요. 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게 그런 순간이에요. 틀에 맞춰진 어른처럼, 어떤 위치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관성적으로)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을 경계해요.
영화 <죄 많은 소녀> 이후 중요한 작품을 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꽤 긴 시간 마주한 전여빈 배우는 참 투명한 사람 같아요. 투명한 마음과 감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죠. 요즘은 무엇을 가장 아름답게 보고 있어요? 근래에 절망을 느낀 크고 작은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 시간 속에서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어요. 나약해졌을 때 약함을 인정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약함과 약점을 감추기 위해 다른 것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 편안함이 제게는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고요. 지쳐 있을 때는 지친 상태로, 힘이 솟을 때는 또 그대로 평정심을 잃고 싶지 않아요. 평정심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계속 잡아주고 믿어주려 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고마워요. 저는 가끔 내 본체는 여기 이렇게 따로 있는 것 같고, 자아가 본체와 분리돼 본체를 움직이는 것 같거든요. 자아가 본체를, 이 몸을 믿어주는 거예요. ‘넘어졌지만 그것도 괜찮아’ ‘다시 일어날 수도 있어. 거봐, 걸을 수 있잖아?’ 하며 북돋워주기도 하고요. ‘너 걸었지? 너는 사실 날 수도 있다’ 하고 큰 용기도 심어주면서. 그렇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