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을 같이 입을 정도로 가깝지만, 한 번도 서로의 진심을 나눈 적은 없는 사이. 한집에서 매일 몸을 부대끼며 사는 엄마 ‘수경’(양말복)과 딸 ‘이정’(임지호)의 관계는 한없이 멀기만 하다. 수경에겐 답답하게 구는 이정이 유난스럽게만 보이고, 이정은 자신에게만 폭력적인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갈등은 모성애, 가족애란 쉬운 이름에 기대 무마되지 않는다. 관계를 규정하는 세간의 표현들을 모두 지우고, 오롯이 자신의 시각으로 수경과 이정의 관계를 완성시킨 김세인 감독의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독립스타상’을 시작으로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5관왕,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 등 수상 기록을 이어가며 독립영화 신의 경쾌한 바람을 일으키는 중이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 대한 호기심은 제목에서 발현되지 않나 싶어요. 어떤 연유로 지은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랄까요. 김세인 예상은 했는데 그보다 더 많이 궁금해하시더라고요.(웃음) 이유는 간단해요. 제목에서 모녀라는 힌트가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모녀’ 하면 떠오르는 프레임에서 빗겨나는 영화니까 제목에서도 그게 느껴졌으면 했거든요. 그럼 어떻게 내 식대로 이 모녀 이야기의 제목을 한 단어 내지 한 문장으로 지을까 했을 때, 두 사람이 내밀하게 공유하는 것을 떠올리게 됐어요. 실은 제가 엄마와 속옷을 따로 입게 된 지 몇년 안 됐어요. 그 생각이 나서 주변 여자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저와 같은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반면 남자들은 부자지간에 같이 입는 경우가 없었고요. 속옷을 같이 입는 행위가 두 인물의 내밀한 관계를 담아내는 모체가 될 수 있겠다 싶었고, 그래서 이런 제목을 짓게 되었어요.
실제로 영화를 보기 전 두 여자의 관계가 친구인지, 연인인지, 가족인지를 두고 관객들의 의견이 분분했어요. 양말복 저는 처음에 퀴어물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간략한 시놉시스를 보니까 ‘한집에 사는 두 여자’라는 표현이 있는 거예요. 그럼 자매인가 싶었는데 실체를 알고 보니 모녀였던 거죠.
제목에서부터 빗겨나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이 규정하는 모녀의 모습과 다른 관계를 그리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김세인 어렸을 때부터 TV나 다른 매체에 등장하는 모녀의 모습이 제가 경험하거나 주변에서 봐왔던 모습하곤 다를 때가 많았어요. 어떤 상을 그려놓고 거기서 벗어난 인물들은 이상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고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을 지라도 ‘이 또한 모녀의 이야기다’ 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게 나만의 생각이면 어쩌나 싶어서 두렵기도 했는데, 배우나 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힘을 얻어 완성할 수 있었어요. 양말복 저 역시 세상이 알려주는 엄마의 모습과 제 엄마의 모습이 항상 너무 달라서 그게 저만의 큰 문제인 줄 알았거든요. 매체에서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저의 엄마는 자신의 삶이 버거운 분이셨어요.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읽고 감개무량했어요. 이 영화가 마치 저의 속사정을 알아보고 꺼내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거죠.
확실히 이 영화 속 모녀는 매체가 규정한 형태 밖의 모습을 띠고 있긴 해요. ‘무슨 모녀가 이래?’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신기한 건 두 사람이 쏟아내는 말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에요. 임지호 실은 이이야기가 더 명확하게 실재하는 삶을 반영한 게 아닌가 싶어요. 특이하고 이상한 모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엄마라면, 딸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진 거죠. 실제로 저도 연기하면서 공감했던 대사들이 많거든요. 양말복 그래서인지 GV에 가면 관객들로부터 ‘이런 장면이 궁금해요’라는 질문보다 고백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가 많아요. 자신의 삶에 어떤 경험이 있었는데 그게 영화를 통해 보여져서 불편했고, 아팠고, 그래서 ‘이걸 어떻게 넘어서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요.
내밀한 두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데 중요했던 것 중 하나는 ‘어떤 배우가 이를 표현하느냐’였을 것 같습니다. 김세인 딸 이정은 말보다 눈으로 뭔가를 얘기해야 되는 장면이 많았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볼 때 배우의 눈을 유심히 살폈는데, 임지호 배우의 눈이라면 이정의 복합적인 감정이 모두 표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반대로 엄마 수경의 경우는 특정한 부분보다 배우가 지닌 에너지가 중요했어요. 자칫 비호감으로 비치기 쉬운 인물이라 배우가 본래 지니고 있는 매력으로 이를 상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양말복 배우여야 했어요. 선배님이 지닌 밝고 천진한 모습으로 수경이라는 인물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양말복, 임지호 같이 하자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웃음)
두 배우는 수경과 이정이라는 인물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나요? 양말복 폭력적인 수경으로 인해 딸인 이정은 늘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에도 이렇게만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르게 보면 이 영화는 일상을 공유하는 두 성인의 이야기여야 하는데, 한쪽은 너무나 누르는 파장이고 다른 쪽은 눌리는 식으로만 작용해선 안 될 것 같은 거예요. 관계란 게 일방적으로만 형성되는 건 아니잖아요. 수경과 이정이 지닌 힘의 밸런스를 맞춰야겠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있었죠. 그래서 이정과의 갈등 외에 수경에게 일상성을 부여하려고 애썼어요. 임지호 이정이는 내내 참고 또 참다가 끝에 다다라서야 어떤 표현들을 하거든요. 그게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이정이 수경에게 쏟아내는 울분이 하루이틀 치의 서운함이 아니라 이십몇 년을 쌓아온거니까 그 시간들이 보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두 인물의 갈등에서 관건은 ‘사과’였습니다. 수경은 끝내 사과를 하지 않으려 하고, 이정은 끝까지 사과에 집착해요. 양말복 수경은 이정과 닮았다는 말을 되게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닮았어요. 둘 다 다른 식으로 집요해요.
감독 입장에서 ‘사과’는 어떤 의미로 작용하길 바랐는지 궁금합니다. 김세인 결국 수경은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인가, 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인가를 가늠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이정에게 폭력적인 말이나 행동을 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죠. 그런데 그 모든 게 수경의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수경에게 사과라는 건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전형적이지 않은, 엄마답지 않은 엄마면 잘못된 건가? 사과를 해야 하나? 이런 질문들을 나누고 싶었어요. 양말복 두 사람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 ‘그냥 서로 미안하다고 하고 넘어가지’ 싶잖아요. 그런데 다른 식으로 보면 이 사과는 굉장히 큰 약속 같은 거예요. 말을 내뱉는 순간 ‘미안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니까요. 그런데 상황을 넘길 생각으로 쉽게 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대개 ‘그냥 넘어가지’라고 여기는 것이 도무지 넘어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걸 사과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만약 사과를 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을까요? 양말복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지만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해졌습니다’는 아닐 거예요. 오히려 이정은 하나의 숙제를 풀었다고 생각하며, 엄마와의 관계에 부질없는 기대를 품었을지도 몰라요. 임지호 수경이 사과를 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렇게까지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을 거예요.
규정되지 않은 모녀 관계를 그리는 이 영화에서 굳이 두 사람을 전형 안으로 들이려는 인물이 있습니다. 수경의 남자 친구인데요. 수경과 이정을, 그리고 자신의 딸과 수경을 ‘닮았다’는 말로 쉽게 규정하려 들잖아요. 김세인 그렇죠. 가부장제나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이데올로기라는 게 강제적일 때보다 은은하게 스며들 때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그려내보고자 수경의 남자 친구 ‘종열’을 활용하게 되었어요. 양말복 어떻게 보면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남자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종열이 가진 좋은 면 반대편에는 자신이 편한 쪽으로 끌고 오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거예요. 수경과 재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다시 꾸리기 위해 억지로 ‘가족같은 분위기’를 만들려는 거죠. 그런데 가족 같은 분위기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냐고요.(웃음) 종열의 말과 행동이 묘하게 불편한 건, 이 지점을 짚어주기 위한 감독님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다 같이 치열하게 사유하며 완성한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작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양말복 체감온도가 영하20˚C 정도 되는 날이었을 거예요. 정말 추운 겨울날, 속옷 차림으로 대로를 걷는 장면을 찍었어요. 제가 팔자걸음을 걷는데, 감독님께서 정확하게 다리를 11자로 모아서 진일보하듯 당차게 걸어달라는 디렉션을 주었어요. 김세인 제가 그렇게 말했었나요? 기억이 안 나요.(웃음) 양말복 (웃음) 걸음걸이를 신경 쓰면서, 추위에 떨지 않으면서, 또 자연스럽게 수경의 감정을 드러내야 했는데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임지호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촬영을 하다 보니 운전하는 신이 많은 거예요. 근데 당시 저는 운전에 미숙한 상태였거든요. 초반에는 엄청 긴장하면서 연기했는데, 신기하게 하다 보니 늘더라고요. 스태프들이 영화 찍으면서 운전 연수받았다는 농담을 했는데, 정말 그래요.(웃음) 한 작품을 하고 났더니 연기 말고도 배우는 게 있구나 싶었어요. 양말복 이 영화를 통해 저는 팔자걸음을 고쳤고, 지호는 운전에 능숙해졌어요. 감독님, 고마워요.(웃음)
물론 감독님의 성장도 있었겠죠? 김세인 작업 방식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수경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여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꽤 심각한 장면이거든요. 그런데 촬영이 잠시 중지된 사이에 스태프 한 분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걸 모른 채로 촬영을 시작한 거예요. 수경이 문을 열자마자 놀란 스태프의 얼굴을 보고 다 같이 웃음이 터진 적이 있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첫 영화라는 이유로 너무 긴장한 채로 달려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완벽하게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유머를 즐기기도 하면서 다 같이 즐겁게 만들어가는 태도도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긴장되잖아요. 더군다나 그 역할이 감독이라면요. 김세인 그렇죠. 또 그런 긴장감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놓친 장면 없이 다 찍은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긴장과 여유의 중간선을 잘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역할을 다하고 이제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금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에 대해 어떤 마음이 남았나요? 김세인 후반 작업을 하면서 든 생각인데요, 이 영화는 어쩌면 ‘혼자 추는 왈츠’가 아닌가 싶어요. 서로 손을 맞잡으면 되는 건데, 그걸 모른 채 각자 춤을 추는 모습이 좀 슬퍼 보였어요. 양말복 왈츠를 배울 때 초반에는 상대의 발을 진짜 많이 밟게 돼요. 감정도 그런 것 같아요. 숙련되어 컨트롤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헛발질을 하고 서로를 밟고 그러는 거죠. 그게 외로움으로 보일 때도 있고, 괜히 공격적인 태도로 나타날 때도 있고요. 지금은 수경과 이정의 서툰 마음들이 보여서 더 애잔해요. 김세인 ‘녹턴’을 계속 들으면서 시나리오를 썼거든요. 왜 이렇게 이 음악만 듣게 되지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엄마의 컬러링이었던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외로운 마음에 일하는 엄마한테 전화를 자주 걸었는데, 바쁘니까 잘 받지 않으셨거든요. 그러니까 집에 혼자 있으면서 녹턴을 계속 들었던 거죠. 이제 보니 영화의 모든 인물이 외로운 마음에 계속 발신만 했던 어린 저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자신의 마음만을 발신하느라 다 어긋났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