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의 동쪽과 서쪽을 오가며 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떠셨어요? 다이내믹했습니다.(웃음) 날씨 걱정을 좀 했는데 30분 남기고 빨갛게 노을이 져서 ‘아, 됐다’ 싶었어요.
오늘 짧지만 가까이 정해인 배우를 지켜보며 인상 깊었던 건 촬영에 함께한 ‘팀 정해인’이 지닌 차분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였어요. 팀 분위기는 배우가 본인을 둘러싼 환경을 어떤 방식으로 꾸려가고 싶다는 바람이 분명히 반영된 결과겠죠? 중요한 것 같아요. 일이지만 그래도 할 거라면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거니까. 얼굴 붉히고, 누군가를 탓하며 일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렇게 한다 해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체로 둥글게 지나가려 하는 편이에요. 다행히 함께 일하는 이들 모두 같은 마음이고요. 어떻게 보면 제가 여기서 제일 모난 사람이에요.(웃음)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커넥트>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눈을 이식한 이와 시각이 연결된다’는 새로운 소재의 이야기죠. ‘누군가와 감정과 촉각이 연결된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웹툰이 시작됐다는 글을 본 적 있어요. 감각의 연결을 오감 중에서 특히 보는 것을 공유하게 된 거죠. 왜 우리가 쌍둥이들 보면 한 명이 몸살이 나면 같이 아프기도 한다잖아요. 실제 사례들도 있고요. 소재 면에서 지금까지 보던 미스터리 스릴러물과는 다르게 다가왔어요. 새로운 도전이지만 재미있게 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던 때를 기억해요?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시나리오를 읽던 그 순간은 생생하게 기억나요. 웹툰을 먼저 보고 시나리오를 봤거든요. <D.P.>, <시동> 등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에 참여한 적이 있으니 시나리오에 원작이 얼마나 충실히 담겼는지, 동시에 시리즈물 작품으로서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궁금해하며 봤어요. 원작에 미이케 타카시 감독님의 철학적인 부분이 더해지면서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완성된 것 같아요. 단순히 장르물이고 오락적인 웹툰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겪는 삶의 고뇌, 외로움과 고독이 크게 느껴졌어요. 특히 동수에게요.
<커넥트>를 통해 동수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얻었나요, 혹은 덜어냈나요? 얻은 건 사람들이요. 좋은 배우들과 스태프들, 감독님을 만났어요. 또 하나는 내 안에 있던 새로운 모습을 봤어요.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던 것들이 표출될 때의 희열이 있었어요. CG 연기 등 처음 시도하는 것들이 있었거든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있을까?’ 등 그간의 질문들이 이 작품을 통해 실현된 것 같아 좋았어요. 덜어낸 것은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될 때가 있구나’예요.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극한으로 자신을 내모는 것이 언제나 최선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감독님이 감각적으로 오케이 사인을 주셨고, 그 과정에서 언어를 넘어 감독님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미이케 타카시 감독의 실험적인 장르적 성향이 배우에게는 도전이자 모험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과는 다른 결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염려는 없었나요? <커넥트>는 감독님에게도 한국에서 한국 스태프들과 함께한다는 면에서 도전과 모험이 었을 거예요. 촬영 내내 이미 큰 성취를 이뤄낸 감독님도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나는 더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나를 어떻게 보지 않을까?’ 류의 걱정은 크게 없어요. 그건 제선에서 끝내야 하는 걱정이고, 그보다는 관객들이 이 작품을 잘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여지는 가에 대해 함몰되지 않으려 하는 편이군요.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의도한다기보다는 어떻게 보여질까를 걱정하면서 연기할 여유가 없어요. 그것까지 걱정하기에는 지금 당장 눈앞의 일을 해내는 것에 급급해요. 보여짐에 대한 염려는 부차적인 것이고, 현장에서 배우로서 지체 없이 해내야 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거죠.
올해는 배우가 된 지 10년째 되는 해죠. 한데 10년 차 배우가 급급하다고 하는 말이 좋게 들립니다. 매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각오와 결기로 임하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집니다. 5년 차, 10년 차 같은 셈은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10년 차 배우’라는 말이 붙는 게 사족 같아요. 그냥 배우죠. 왜 그렇게 불릴까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곳에서 이만큼 버텼다’는 의미 같기도 한데요. 저는 개의치 않는 편이에요.
배우라는 직업은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다 해서 능사는 아니라고 들립니다. 그렇죠. 작품을 많이 하고 경험한다고 해서 모든 작품마다 인상적인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매 순간 어려울 수 있고, 박살 날 수도 있어요. 뜻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배우기도 하고요. 어떤 순간에는 막 연기를 시작한 배우들이 더 잘해내기도 하죠. 물론 경험에 의한 데이터베이스는 있죠. 경우의 수에 더 잘 대비할 수 있고요. 하지만 온전히 연기만을 놓고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아요.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한 일이기도 해서 날 것의 에너지를 후배들에게 배울 때도 있어요.
그 점이 참 두렵게 할 것 같아요. 섬뜩해요. 반성도 많이 하게 되고 뜨끔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은 안 하죠. 마음속으로 ‘오, 잘하는데?’,‘이건 좀 배울 점이 있는데?’ 하며 캐치하는 거죠.
10년 동안 20여 작품을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동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결국 이 일을 즐기고 재미있어 하고 사랑하는 게 동력이지 않을까 싶어요. 일하지 않는 시간을 못 견디는 건 아니에요. 일하지 않는 시간도 나름대로 잘 채워요. 근데도 연기가 재미있고, 하고 싶어요. 어려워도 재미있죠.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를 느끼지 않는 이상 계속 하는 거죠. 신호가 느껴지면 충전하고, 다음 작품에서 충전한 만큼 쏟아내면 되고요.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요. 이건 배우 외에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같아요. 내가 아픈데 뭐가 중요해요. 그 아픔은 오직 나만 알잖아요. 손톱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나만 아는데. 내 고통은 공유가 안 되니까.(웃음) 자신을 잘 알고 컨트롤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을 쓸 때까지 써보는 편이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무엇보다 다 안 써보면 뭔가 찝찝하잖아요. 작품 마쳤을 때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가 한계인지 알지 못한 채 마무리되면 수치적인 결과가 만족하게 나와도 마음이 개운치가 않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걸 내가 아니까요. 얻어걸렸다는 걸 남들은 모를지라도 나는 알잖아요. 반대로 결과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으면, 내 한계를 안 거잖아요. 그래서 몰아붙이는 편이에요.
한데 문제는 배우의 일이란 노력과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일이라는 점이에요. 그렇죠. 한 사람만 잘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닌 일이기에 함께하는 스태프분들이 있는 거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는 거겠죠. 혼자 죽을힘을 다한들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요. 온 힘을 다하는 걸 알아봐주는 스태프들이 있어야 진가가 발휘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하는 순수예술도 아니고 함께 부대끼면서 완성해가는 협업이기에 나 혼자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한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아는 스태프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은 다 전달된다고 믿거든요. 내가 진심을 다하면 알아요. ‘이쯤 하면 되겠지?’ 하고 타협하는 것도 다 알고요. 무엇보다 내 쪽에서 그렇게 타협하면 마음이 불편해요. 언젠가 탄로날 것 같고요.
배우라는 직업은 본인 자체가 재료이자 모든 것의 원천이죠. 나라는 도구를 어떻게 써가고 싶어요? 쓰임이 있을 때 열심히 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쓰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잔인한 얘기지만 팩트입니다.(웃음) 찾아줄 때 하는 거죠. 언제까지 찾아주지 않아요. 쉬는 건 틈틈이 알아서 쉬면서 쓰임이 있을 때 열심히 해야겠죠. 나중에 쓰임이 없으면 또 제가 또 쓰임 있게 만들어서 ‘저 좀 써주세요’ 하면서요. 맞는 부속품이자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마무리할까요. 정해인 배우님이 요즘 무엇을 봤고,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삶에서 배우가 보고 느끼는 것들이 연기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잖아요. 어제 숙소에서 영화 <프라이멀 피어>를 봤어요. 1996년에 만들어진, 리처드 기어와 에드워드 노튼이 주연인 작품인데 가슴 뛰는 영화였어요. 감사하게도 <베테랑 2>에 함께하는 황정민 선배님이 이 영화가 제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말씀하셨대요. 다 보고 난 뒤에도 내내 그 영화 생각 중이에요.
귀국 후 영화 <베테랑 2> 대본 리딩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베테랑 2>에서도 이전과 다른 결의 도전을 하죠. 곧게 뻗은 길에 배우가 다양한 변주를 주고, 이를 즐기려 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상한 모험 정신이.(웃음) 직구도 던지는데 변화구도 던지고 싶고 커브도 던지고 싶은 거죠. 목적지는 한곳이지만 다양한 경로를 지나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