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모헤어 수트 재킷과 화이트 코튼 셔츠 모두 프라다(Prada).

 

“계획하지 않은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런 순간을 만난 사실이 소중했고요.”

 

다크 블루 울 더블브레스트 트렌치코트와 파이톤 가죽 프린트 레더 화이트 하이힐 모두 구찌(Gucci).

아까 촬영하면서 크게 웃을 때 드라마 <치얼업>의 ‘해이’가 보였어요. 도해이는 한지현 배우 그 자체라는 얘기가 있던데, 싱크로율로 따지면 어느 정도인 거예요? 99.999%요.

나머지 0.001%의 간극은 무엇인가요? 이름이 다르다는 것? 혹시 모르니까 그 정도는 남겨두고 싶어요.(웃음) 아, 해이가 가끔 세게 말할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긴 해요.

연기자가 새 작품에 들어갈 때면 대개 연기하는 캐릭터와 동화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이 작품은 그 시간이 없어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해이라는 사람 자체를 이해하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다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해이가 된 것처럼 사람들을 대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정우’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요, 실제로 입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도 진심으로 어려웠어요. 사실 우는 신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한참을 울었어요. 그때까지는 상대 배우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하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는데, 그날 이후 해이의 감정 자체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새로운 방식을 익힌 셈이네요. 맞아요. 전작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특히 눈물 흘리는 장면에 대한 걱정이 컸어요. ‘만약 눈물을 못 흘려 시간이 지연되면 민폐를 끼치는데 어쩌지.’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촬영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잘 준비해야 했고요. 그런데 <치얼업> 후반부에는 그냥 맨몸으로 툭 현장에 놓여도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렇게 계획하지 않은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런 순간을 만난 사실이 소중했고요.

분명히 배운 점이 있다는 면에서 귀중한 작품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요. 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에도, 살아가는 데에도 앞으로 치고 나갈 힘을 얻었어요. 해이를 연기하면서 많이 웃고 울었거든요. 그러면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이 배움이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지만요.

 

그린 베스트와 그린 와이드 팬츠 셋업 아미(Ami), 블랙 실크 레이스 슬립 톱 이로(Iro), 블랙 로퍼 미우미우(Miu Miu),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치얼업>을 보면서 예상했지만, 실제로 만나니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명랑하고 밝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아요. 오늘 촬영에서 지나치게 정적인 컨셉트를 제안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웃음) 실제로 성격이 밝은 편이기도 하고, 일할 때는 특히 처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좀 힘들거나 실망할 일이 생겨도 그런 기분은 집에 가서 느끼고 밖에서는 기운차게 움직이려 하죠. 그리고 부정적인 기분이 한 10분 가나?(웃음) 금세 까먹어요. ‘아 너무 힘들다’ 하다가도 돌아서면 ‘그런데 뭐 먹지?’ 하면서 신나는 사람이에요.

엄청난 회복력인데요? 다르게 보면 회피형인 것 같기도 해요. ‘일단 덮고 앞으로 나가자’ 하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그렇다고 쌓아두고 사는 건 아니지만요. 안 되겠다 싶으면 일단 자요. 그리고 일어나 샤워 하고 나면, 잡생각이 말끔하게 정리되고 다시 발랄해져요.

한지현 배우가 지닌 특유의 경쾌한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방식이네요. 못 믿는 사람이 많은데, 이만하면 저 많이 차분해진 거예요.(웃음) 예전에는 촬영장에서 막 뛰어다녔는데, 20대 후반이 되니까 조금은 땅에 발을 붙이게 되더라고요.

마흔 즈음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는데요. 완전히 땅에 발을 붙이게 될까요?(웃음) 그런데 요즘 좀 무거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발성도 차분하게 하는 방식을 연습하는 중이고요.

배우로서 더 다양한 표현 방식을 품고 싶은 거겠죠? 이번에 가장 아쉬운 점이 해이의 눈이 잘 보이지 않은 거예요. 온 얼굴을 다 써서 표현해 그런가 싶어요. 짧은 대사 한마디에도 깊이 몰입하게 되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그게 눈의 힘인 것 같더라고요.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면 간혹 내뱉는 말과 눈빛으로 하는 말이 다르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요. 눈은 한없이 슬픈데 말은 건조하게 할 때 그 슬픔이 더 크게 와닿는 연기요. 그렇게 눈빛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지금은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인데요.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배우에게는 하나의 숙제일 것 같아요. 아주 열심히 쉬고 있어요. 연기하지 않을 때의 저도 중요하니까요. 다음 일을 열심히 하기 위해 잘 쉬는 중이에요.

바다도 실컷 보면서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한동안 바다에 머무른 것 같던데요. 계획한 건 아닌데, 새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산에 다녀오고 끝나면 바다에 가게 돼요. 산은 정상이라는 목적을 두고 오르지만, 바다는 별다른 목표 없이 그저 보고 오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에너지를 채우고 싶을 때는 산에 가고, 비우고 싶을 때는 바다에 가나 봐요. 이번에 찾아간 바다가 아주 좋았어요. 드넓은 해안에서 노을을 보는데 더없이 신비롭더라고요. 제가 이 지구상에서 이렇게 광활한 자연과 함께 사는 생물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정도로요. 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바라봤는데, 그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 루틴으로 동력을 얻는 것도 꽤 효과적인 방법 같은데요. 시작할 때는 산으로, 끝나면 바다로요. 괜찮죠! 다음에도 해보려고요.(웃음)

 

트렌치코트와 브이넥 스웨터, 버건디 컬러 왁스드 코튼 보디수트, 울 미니스커트 모두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블랙 모헤어 수트 재킷과 화이트 코튼 셔츠, 화이트 코튼 팬츠, 블랙 메리제인 슈즈 모두 프라다(Pr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