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영화 <리바운드> 개봉을 앞두고 있죠.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는 지금, 절묘한 등장입니다. 촬영할 때만 해도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몰랐어요. 현장에 <슬램덩크> 마지막 권을 항상 지니고 다녔어요. 워낙 팬이거든요. 거실 벽에 <슬램덩크> 브로마이드가, 음… 브로마이드, 너무 옛날 말인가요?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거든요. 그 시절을 산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슬램덩크>는 제게도 인생작이라. 부적처럼 기운을 받고 싶어서 현장에 들고 가고, 쉬는 날이면 한 번씩 읽어봤을 정도로 팬이에요.
최애 캐릭터를 묻지 않을 수 없네요. 그때그때 다르지만 아무래도 산왕의 정우성이.
북산이 아니군요? 저도 어릴 때는 북산 팬이었고, 언더도그가 주는 희열이 있잖아요. 북산의 시점으로 봤을 때는 정대만, 강백호도 좋아했어요. 제 또래 남자 친구들이라면 한 번쯤 다 정대만을.(웃음) 정우성은 세계관 안에서 가장 실력자이기도 하고, 절제미가 있는 캐릭터잖아요. <슬램덩크>는 결국 산왕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니까. 신현철도 좋아하고요. 해남의 신준섭, 이정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있는 작품이잖아요. <슬램덩크>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해요. 신현철까지 갔네요. 제가.
거실에 브로마이드가 있을 법합니다. 잠시… 애니메이션 얘기를 조금만 더 하면(웃음) 개봉 첫날 봤는데, 오프닝 기억나시나요? 스케치가 그려지면서 인물들이 걸어 나오잖아요. 그 장면부터 눈물이 나는 거예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20년이 지난 지금, 어릴 때 느꼈던 뜨거움이 동일한 강도로 울림을 준다는 것이요.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굉장한 힘을 지닌 작품이죠.
영화 <리바운드>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고민할 이유가 없었겠군요. <리바운드> 시나리오를 받은 것도 그 자체로 특별했던 게, 그때 집에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보면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 심지어 닭강정을 먹고 있었죠. (안재홍 배우는 현재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을 촬영 중이다.) 장항준 감독님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는 감독님과 인연이 없을 때였는데 차기작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부산의 한 고등학교 농구부가 전국 대회에 출전하는 실화인데 한 공익 근무 요원이 덜컥 코치 자리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뜨거운 이야기’라고 영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다 하셨거든요.(웃음) 그 장면을 보는데 기분이 묘하더군요. 왠지 저 공익 근무 요원이 나일 것 같다, 나였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심지어 영화의 배경이 고향인 부산이죠. 제가 그 근처 고등학교를 다녔거든요. 배경을 떠나서라도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 방송을 보고 정확하게 3일 뒤에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시나리오를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데 ‘하아…’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거 있잖아요. 마지막 장에 실화라는 걸 알리며 끝이 나는데, 마음이 훅 하고 움직이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바로 꼭 하겠다고 결정했어요.
해체 위기에 놓인 최약체 팀인 부산중앙고 농구부가 전국 대회에서 준우승한 실화를 알고 나면 이 영화 제목인 ‘리바운드’라는 농구 용어가 더 특별하게 다가오잖아요. 전체 서사를 아우르는 단어죠. 맞아요.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인 강양현 코치님이 ‘리바운드는 운으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리바운드는 노력과 의지로 잡아내야 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거든요. 우리 영화 역시 실수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공을 다시 잡고 기회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을 살아가는 모두와 나눌 수 있는 말이고요. 리바운드의 의미가 요즘 시대에 더 와닿는 것 같아요.
맞아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죠. 참으로 절묘합니다. 그러니까요. 신기할 따름입니다.
강양현 코치의 개인 서사도 인상적이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최약체 팀을 맡지만, 점차 그 안에서 진심을 다하게 되며 성장하는 인물이잖아요. 영화는 예기치 않게 코치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은 강양현이라는 인물이 초심자로서 실수하고 부딪히고, 꺾이려 하는 순간도 있지만 끝내 리바운드를 해내는 서사이기도 하거든요. 극의 시간순으로 촬영했는데, 그 흐름 속에서 강양현이라는 인물과 제가 동일시되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반에는 의욕이 앞서서 밀어붙이기만 하고, 모든 걸 그르치는 순간도 맞이하죠. 그러다 이 친구가 굉장한 걸 깨닫고 변화해요. 순간을 느끼고, 즐기는 인물로 변모하는데 그때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한 장면이에요. 경기 장면이 거듭되면서 점점 이 인물의 얼굴도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초반에는 어딘가 좀 떠 있는 것 같고, 선수들의 마음을 움켜쥐고 앞으로만 가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고요. 한데 어느 순간 아이들과 마음을 열고 호흡을 같이하면서 코치가 아닌 한 명의 선수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어요. 촬영할 때도 마치 실제로 경기를 하는 것처럼 땀이 나고 목이 다 쉬고요. 선수 역을 맡은 배우들과 동선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타임아웃 벨이 울리자마자 서로 그냥 달려와서 포옹했는데 짜릿했어요. 진심으로 서로 한 팀이었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스포츠를 소재로 한 성장 드라마가 주는 희열이 있죠. 강함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요. ‘진짜 강하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하고요. 이 이야기가 좋은 점이 ‘무조건 이겨내라’고 다그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극 초반에 강양현이라는 인물은 ‘무조건 우리가 제패한다. 해낸다. 오늘 하루 죽자. 여기서 다 같이 죽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시작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삶은 계속된다’는 깨달음을 얻어요. 그 이후 ‘이 순간을 후회 없이, 남김없이 즐기자. 우리’ 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 순간이 참 아름다웠어요. 저에게도 커다란 메시지를 준 것 같고요. ‘몸이 부서져라 뛰어. 무조건 이겨야 된다’ 하는 강요가 아니라 ‘이 순간은 영원히 한 번뿐이라는 것, 지금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영화 밖 본인은 어떤가요. 순간을 소중히 보내려는 편인가요? 30대부터 그러기로 마음먹었거든요.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는 시점에 이 시간들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순간을 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왔고요. <리바운드>를 만나고 나서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촬영이 없는 날에는 걸으려고 하는데, 촬영장에서도 짬 날 때마다 계속 걸었어요. 걸으면 생각도 정화되고 정돈되니까. 안동에서 주로 촬영했는데 하루 2만 보씩 걸었던 것 같아요. 안동이 걷기가 좋거든요. 왜 양반들이 살았는지 알 듯한(웃음) 아름다운 곳이에요. 여름이니까 돌아오는 길에는 땀이 많이 나고 다리도 좀 풀려 있잖아요. 장항준 감독이 ‘어제도 걷는 거 봤다’고, ‘좀비인 줄 알았다’고.(웃음)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이 반드시 뭔가를 바쁘게 하겠다는 의미라기보다 무엇을 하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려 하는 편이에요.
감독이자 배우로 완성한 영화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안고>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피렌체 한국영화제 등에 초청받았죠. 잘 봤어요. 처음에는 대여로 봤는데 결국 소장하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장이면 2천8백원.
디테일하게 알고 있네요. (웃음) 저도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요.(웃음)
연출을 해보니 감독의 마음이 좀 헤아려지던가요? 아니더라고요. 공만 둥글다 뿐 농구와 축구가 다른 운동이듯 배우와 감독의 역할도 다를 수 있겠다 싶은 경험이었어요. 이 작업이 자의로 시작된 거잖아요. 영화학과 학생일 때 과제하듯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오로지 제 선택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판을 벌였을까.’(웃음) 누가 나한테 울릉도에서 영화 한 편만 만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만든 고행 속에서 얻은 것이 있죠? 집단 지성의 힘을 믿게 됐죠. 저를 포함해 총 10명의 스태프로 이뤄진 팀이었는데 아주 가깝게 지냈어요. 마치 한 봉고차에 탄 여행객의 마음으로 울릉도에서 열흘 동안 촬영했어요. 촬영 과정 전체가 제게는 즐겁고 행복했던 소중한 기억이에요. 현장에서 막히거나 쉬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조감독과 촬영감독, PD 형, 상대역인 이솜 배우에게 의견을 많이 물었고요. 그들이 의견을 잘 모아준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자주 만날 정도로 친해졌고, 소중한 시간이었죠.
감독을 하는 것도 배우로 사는 것도 결국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잖아요. 본인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기보다 엔딩이 인상적인 영화를 좋아하게 되더라고요. 영화가 끝나고 암전됐을 때 그리고 감독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 오를 때,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개봉 날 봤거든요. 배트맨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고, 아이맥스 상영관 티켓을 구하기가 굉장히 힘들 때였어요. ‘로빈’인 조셉 고든 레빗이 등장하면서 영화가 끝나고, 잠깐의 정적 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름이 딱 뜨는데 극장 안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고요. 모두가. 그 순간 마음이 웅장해지면서 영화를 같이 본다는 것이 이렇게 큰 감정을 공유하는 시간이구나 하고 깊이 느꼈어요.
일반 상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이례적인 일이잖아요. 보통 영화제나 시사회에서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잖아요. 한데 그곳에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온 것도 아닌데.(웃음) 개봉 날 누구보다 이 영화를 기다리고, 보고 싶었던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이었던 거죠. 저도 같이 박수를 따라 쳤어요.
당시의 모습이 그려져요. 아름답게 들립니다. 묘했어요.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울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