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자유롭게
김슬기

크롭트 재킷, 안에 입은 브라톱 모두 미우미우 (Miu Miu), 진주 네크리스 발렌티노 가라바니 (Valentino Garavani).

 

“사람들 겁주고 벌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시겠다?
그런 데가 하나 더 있죠.
지옥이라고.”

드라마 <지옥>, 배영재 役

 

크롭트 재킷, 안에 입은 브라톱, 쇼츠, 페니 로퍼 모두 미우미우 (Miu Miu), 진주 네크리스 발렌티노 가라바니 (Valentino Garavani), 니삭스와 그 위에 덧신은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최근 젠더에 관해 동료 배우들과 주고받은 대화가 있다면?
여자라면 이 상황에서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울지 않는 여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한 남성 배우는 ‘감정을 표현할 때 남성이 여성보다 자유로운 것 같다’고 했다. 배우로서 울음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 대화의 시작점이었다. 연극 무대에서 회차마다 똑같은 대사를 말하더라도, 슬픔이 느껴지는 시점이나 그 감정의 크기가 매번 다르지 않나. 이처럼 드라마나 영화 작업을 할 때도 모든 배우가 ‘운다’라는 지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각자의 진실된 연기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지옥>의 방송국 PD ‘배영재’(박정민)를 연기했다. 내면에 가득 찬 불만을 강하게 분출하기보다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점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짜증을 내는 연기가 여성 캐릭터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어 이 장면을 선택했다. 30대는 연기의 폭을 넓히기 좋은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기에 함께한 젠더 프리 프로젝트도 배우로서 젠더의 경계에 대해 다시금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 캐릭터나 서사의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고 체감하나? 예전에 남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가 ‘여성 캐릭터가 아직 없다’는 답변을 받은 적이 있다.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연기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나아졌다고 본다. 장애인이나 성 소수자 등 다양한 여성 캐릭터의 이야기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여성들이 특히 인상 깊다. 여성의 열정과 야성이 느껴져서 좋다.

그동안 연기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 중 지금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나? 단막극 <드라마 스테이지: 내 연적의 모든 것>의 ‘오선영’. 연인 관계인 남성에게 의존하고 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선영은 이별 후 스스로를 재정립하며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자신의 틀을 깨고,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행복한 삶을 좇는 캐릭터라 재미있게 연기했다.

배우로서 어떤 서사에 끌리는 편인가? 희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배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품 속 세계에 다양한 인물이 필요할 테고, 그중에는 희망을 앗아가는 인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예전에는 낙관적인 인물에 주로 관심을 가졌는데, 요즘은 그 외의 역할도 잘 소화해내며 그 결과물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그게 배우의 몫이 아닐까 한다.

작품 속 인물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려 하나? 요즘 나와 같은 회사에 소속한 배우들과 연기 스터디를 하며 ‘본성으로 연기한다’는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나와 캐릭터 사이에서 부대끼는 정서나 사상 등도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지닌 천성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다. 동료 배우들과 함께 연구 하는 스터디는 초심을 되찾고, 연기에 대한 열성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연기는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며,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일이지 않나. 그래서 배우는 끊임없이 인격을 수양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연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인 것 같다. 어려운 과정임에도 계속 연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카메라 앞에 서면 앵글 안에 갇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에 가장 자유롭다. ‘연기할 때 살아 있음을 느끼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고민한 끝에 ‘그렇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배우로서 지금 소망하는 바는 무엇인가? <SNL 코리아>에 출연하던 데뷔 초반에 받은 편지를 다시 본 적이 있는데, ‘웃음을 줘서 고맙다’는 문장을 읽으며 희극 연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연기의 영역을 정극까지 확장한 지금은 웃음과 더불어 어떠한 메시지가 전해졌을 때 뿌듯하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나 출연한 작품, 혹은 김슬기라는 배우를 통해 누군가 자연스레 긍정적 영향을 받는다면 좋겠다. 한편으로 나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도 있을 수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런 태도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균형 잡힌 안정적인 삶에서 나오는 여유와 사랑을 주변과 나누고 싶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할 생 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