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고 사유하며
김히어라

데님 롱 베스트와 팬츠 모두 막스마라(MaxMara).

 

“정의를 위해서?
그런 거창한 이유 아닙니다.
그냥, 숨 좀 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숨 좀 쉬게 해주십시오.”

연극 <보도지침>, 정배 役

 

데님 롱 베스트와 팬츠 모두 막스마라(MaxMara).

 

Q. 확실히 전보다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틀을 벗어난 시도가 이뤄지고 있고, 그래서 더 많은 가능성이 열린 것 같다.
특히 연극 신에서 변화를 체감하는 순간이 많다. 여성 캐릭터를 주체적으로 그려내는 건 물론이고 젠더 프리 작품도 꽤 많아졌다. 동료들이랑 매번 타이밍이 참 좋다,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지금은 많은 창작자가 어떤 인물도 소모적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애쓴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이 인물을 연기하면서 너무 편협한 건 아닌가, 전형에 기대지는 않았나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연극 <보도지침>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보도 지침을 폭로한 기자가 그 때문에 숱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강경하게 최후진술을 하는 부분이다. 극 중 기자 ‘정배’가 ‘내가 <월간 독백>을 내는 이유는 누군가에 대한 공격이나 대단한 정의로움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숨 좀 쉬고 싶어서,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어서’라며 내뱉는 외침이 내내 마음에 남아 선택했다.

젠더 프리 롤로 연기한 정배라는 인물은 그간 늘 남자 배우가 맡아왔는데, 김히어라 배우의 연기를 보고 나니 이 역할이야말로 굳이 젠더의 경계를 둘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보도지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 역할은 ‘여자’였다. 기자, 검사, 변호사, 판사 등 정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었고. 그래서 당시에도 역할을 젠더 프리로 하면 어떠냐는 얘기가 나왔는데 실제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고, 당시 실존 인물이 모두 남성이라는 이유로 결국 이뤄지진 못했다. 그래서 더 이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때의 바람이 지금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여성이라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인물을 많이 맡았다. 드라마 <배드 앤 크레이지>의 ‘용 사장’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계향심’, <진검승부>의 ‘태 실장’ 등 모두 본인의 욕망 혹은 목표를 향해 달리며 끝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인물이다. 내가 이런 인물에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요즘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나는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질문을 품고 산다. 왜 이 작품을 하고 싶은지, 내가 맡은 인물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왜 이런 말을 내뱉는지, 그리고 나는 왜 배우로 사는지 등 항상 ‘왜’로부터 시작되는 질문을 한다. 시원한 답을 얻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은 아니다. 그저 질문함으로써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중 답이 궁금한 질문이 하나 있다. ‘왜 배우로 사는가?’라는 질문이다. 살다 보면 감정적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이 오지 않나. 연기하면서 그때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그러니까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도 이 또한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 마냥 무너지지는 않는다. 배우라는 직업이 내 삶에 에너지를 보내주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연기하고 싶은 인물, 서사, 감정은 무엇인가? 너무 많다. 사실 이번 젠더 프리 롤도 한 작품만 선택해야 해서 많이 아쉬웠다.(웃음)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나 영화 <사도> 같은 시대극도 해보고 싶고, 영화 <연애의 목적>의 ‘유림’(박해일) 같은 가볍고 능글맞은 인물도 시도해보고 싶다. 이와 반대로 여성이라 가능한 이야기도 연기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아주 잘 표현한 이야기, 그러니까 너무 힘들거나 슬프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 작품을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작품이 더 많을 거라는 기대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