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된 시선
박소담

원피스 MM6 바이 아데쿠베 (MM6 by ADEKUVER), 재킷 앤 드뮐미스터 바이 아데쿠베 (Ann Demeulemeester by ADEKUVER), 슈즈 세르지오 로시 (Sergio Rossi), 이어링과 네크리스 모두 어니스트서울 (Honest Seoul).

 

“그 코끼리가 다 커서 지 힘으로
말뚝을 뽑아버릴 수도 있는데도
그러지 못해. 왜 그런 거 같애?
그건 말이야,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이미 포기해버린 코끼리 자신의
생각 때문이야.”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 앙리 役

 


Q. 이번 젠더 프리 프로젝트에 응하면서 ‘시도해보고 싶었다’는 말을 전했다.
개인적으로 큰일을 겪고 나니 가치관이 많이 변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 이 일을 굳건하게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던 차에 받은 제안이라 큰 고민 없이 도전했다. 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고, 또 다른 배우들과 함께 나오는 이 영상에서 우리는 서로 어떤 에너지를 주고받을지 궁금했다.

 

이번 젠더 프리에 참여한 배우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두고 고민했다. 그리고 연극 <앙리 할아버지와 나>의 한 장면을 택했다. 남자 배역의 대사는 처음 시도해보는 거라 어떻게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수많은 작품을 찾아봤는데, 문득 몇 년 전 출연한 <앙리 할아버지와 나>가 뇌리를 스쳤다. 무대 위에서 ‘콘스탄스’ 역할로 듣기만 했던, 그 다정한 말을 내가 앙리 할아버지가 되어 직접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나 드라마도 생각했는데 그건 어떻게든 다시 찾아서 볼 수 있는데, 연극은 직접 와서 봐야 하니까 이 좋은 대사를 짧게나마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최근 개봉한 영화 <유령>을 포함해 <기생충> <특송> 등 그간 여러 작품에서 주체성이 두드러지는 인물을 연기했다. 특히 <특송>의 ‘장은하’는 인물이 지닌 성정도 그렇고, 카 체이싱이라는 소재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욕심나는 캐릭터였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영리하게 해결하고, 고달픈 삶임에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응원하고 안아주고 싶었다. <유령>의 ‘유리코’이자 ‘안광옥’도 마찬가지고. 아무래도 내가 삶에 대한 에너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인물에 끌리는 것 같다.

배우는 작품으로 세상을 배운다고 하지 않나. 배움의 관점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면? <기생충>을 기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에도 내 것만 봤던 것 같다. 그것만 잘해내기에도 벅찬 시간이었다. 그런데 <기생충>에 출연하면서 비로소 현장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에게만 집중하던 시선이 더 넓어졌다. 영화라는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려준 작품이다.

지금은 영화 안에서 어떤 것을 보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영화를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와의 만남도 그렇지만, 현장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예전에 김혜수 선배님이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한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미래에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는 거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해를 넘기는 시간 동안 가족보다 오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힘을 주고받는 사이니까.

요즘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입시를 준비할 때부터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고, 오디션을 보면서 작품에 임할 때마다 점점 물음표가 커지는 질문이 있다. ‘나 지금 잘하고 있나?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감독님이나 동료 배우에게도 자주 물어본다. 이해영 감독님이 너처럼 질문을 많이 하는 배우는 처음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다.(웃음)

답을 구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듣고 나면 안심되는 말이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질문을 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고민에 사로잡힌 배우가 연기를 끝내자마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나 방금 괜찮았어? 잘하고 있는 거 맞아?’ 하고 물을 때 누가 아니라고 말하겠나.(웃음) 영화 <유령> 촬영 때 (이)하늬 언니는 “어휴, 뭐래. 잘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하며 유쾌하게 받아줬었다. 어쨌든 대답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이들의 모습에서 모두 진심이 보이긴 했다. 그 마음이 내가 쓰러지지 않게, 잘 버티게 해주는 것 같다.

앞으로 더 폭넓고 다양한 시도를 보여줄 것을 기대하게 하는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내 시작이 연극이니 무대에도 계속 서고 싶다. 언젠가 뮤지컬 작품을 해보는 게 지금 가진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