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는 과정
류혜영

백리스 롱 드레스 발렌티노(Valentino), 안에 입은 데님 팬츠 이에이에(YIEYIE), 안에 입은 브라톱 미우미우(Miu Miu), 슈즈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골드 로고 이어링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tino Garavani).

 

“서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꼿꼿한 사람은 드물어요.
나는 그게 서래 씨에 대해 많은 걸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장해준 役

 

화이트 셔츠와 레이어드한 홀터넥 비즈 드레스 모두 미우미우(Miu Miu).

 

Q. “성별이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라면 주로 남성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같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쉬운 점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여성 캐릭터와 서사는 여전히 제한받고 있고, ‘이런 캐릭터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인식도 남아 있다. 언젠가 나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이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중심의 작품을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작품 속 여성들에게 더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준비되어 있는 여성 배우는 많고, 우리가 즐거운 경쟁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장해준’(박해일)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해준이 ‘송서래’(탕웨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서래 씨는 몸이 꼿꼿하다’라는 표현을 쓴 점에 마음이 이끌렸다.위트가 느껴지는 대사인데 진지하게 연기해보았다. 박찬욱 감독님 특유의 유머를 좋아하고, 본인의 울타리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인 서래도 멋진 여성이라 느꼈다. 작품을 통해 주체적인 인물을 만나면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연기를 통해 그의 삶을 살아볼 수 있어 고맙다.

배우로서 어떤 서사에 끌리는 편인가? 소소한 사람 이야기. 요즘 다큐 미니시리즈 <인간극장>을 즐겨 보는데, 더없이 감동적이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고, 평범한 삶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서로 다른 삶을 살더라도,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행복이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려 한다는 점도 깨달았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게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이 지닌 힘인 것 같다.

배우는 작품으로 세상을 배운다고 하지 않나.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나? 그동안 나와 반은 비슷하고, 반은 다른 인물을 연기했다. 나의 어떤 면을 발췌해 사용하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즐겁게 배워가는 편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로스쿨>의 ‘강솔A’를 연기할 때는 내가 배우로서 전작에서 보여준 지적인 면과 캐릭터 특유의 엉뚱한 면을 잘 버무리려고 했다. <로스쿨>이 법을 심도 있게 다룬 작품이라 재미있는 도전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캐릭터의 삶과 내 삶이 닮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으니 작품 속 세상을 알아가는 순간을 누리려 하는 편이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증을 느끼더라도, 결국에는 사랑이 이기는 것 같다.

젠더 프리 프로젝트가 이어져온 지난 시간 동안 성별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졌다. 배우로서 변화를 체감하나? 그렇다. 요즘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로 채워진 큐레이션이 OTT 등에 잘 마련되어 있다. 전형성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가 많아지며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등장할 여성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요즘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왜 내가 이 길로 인도되었을까?’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자주 던진다.(웃음) 배우는 나 자신을 알아가기 좋은 직업인데, 나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내가 부족한  사람이구나’ 싶은 순간이 온다. 그때 연기의 쓰라린 고통을 느낀다. 내 단점을 발견하더라도, 이를 직면해야 언젠가 연기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며 배우로서 좋은 결과를 이뤄내면 보람을 느낀다. 그게 내가 계속 연기하는 이유인 것 같다. 나에 대해 아는 범위가 앞으로 점점 넓어질 거라 확신한다.

배우는 선택받아야 지속 가능한 직업이다. 이 일을 보다 주체적으로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 나의 중심을 더 굳건하게 다지려고 한다. 그래야 쉽게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비틀거리는 순간이 있지만, 단단한 중심을 지키려는 생각은 내려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배우로서 지금 소망하는 바는 무엇인가? 연기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찰나의 표정일지라도 내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점이 두려우면서도 좋다. 인간 류혜영이 작품에 담길 수 있으니 내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고, 일에서도 일상에서도 더 큰 여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