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하게
이엘

셔츠 드리스 반 노튼 (Dries Van Noten).

 

“버림받는 덴 나도 꽤 익숙해.
아무튼 이 얘기의 교훈은 사람은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라, 상황을.”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한재호 役

 

드레스 발렌티노(Valentino), 샌들 지안비토 로시 (Gianvito Rossi).

 

Q. 젠더 프리 연기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의견을 보내왔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의 연기를 하지만, 남성처럼 보이는 스타일링은 지양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남녀의 이분법을 벗어날 때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태어날 때의 성별은 의미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성, 여성, 제3의 성 등 다 떠나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젠더 프리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않나 싶다. 수트에 타이를 매고 있을 때도,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을 때도 전하는 나의 말과 감정이 상대의 마음에 온전히 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세상일 테니. 이런 생각에서 제안 아닌 제안을 해봤다.

 

제안을 듣고 경계를 넘는 시대에서 허무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작전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웃음)

요즘은 어떤 서사 혹은 캐릭터에 끌리는 편인가? 똑똑한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 같다. 극에서 주어진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캐릭터가 좋다. 서사의 측면으로 보자면 요즘은 악인이 가득하거나 극단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못 보겠다. 큰 사건 사고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이야기나 희망을 말하는 작품을 찾아서 보는 편이다.

눈길이 가는 배우를 떠올린다면? 제니퍼 로렌스나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한 캐릭터들을 무척 좋아한다. 특히 제시카 차스테인이 주연한 <미스 슬로운>은 쉰 번도 넘게 봤다.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결국은 모든 권력을 쥔 이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두는 ‘슬로운’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만큼 명확하고 현명하게 연기할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주체성을 가진 인물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간 맡아온 인물들에서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성향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드라마 <도깨비>의 삼신할매와 <최고의 이혼>의 ‘진유영’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인물이지만 둘 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하고 움직이고 선택한다. 특히 유영은 이런저런 이유로 흔들리기도 하지만, 끝내 자신을 놓지 않고 지키면서 살아가는 점이 마음에 든다.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사실 질문보다는 채찍질에 가까운 생각을 많이 한다. 작품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타이밍에 ‘네가 이 작품에 대해, 인물에 대해 다 알아? 네가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자신하지 마’ 하며 스스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작품으로 세상을 배운다고 하지 않나. 배움의 관점에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출연하면서 사람을 많이 관찰하게 됐다. 산책길에 앞서 걸어가는 사람, 차를 타고 가다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저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 기분은 어떨까? 저분의 삶은 어떨까? 하며 각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주변 지인부터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까지 더 깊이 보려고 하면서 누구든 함부로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누구든 재단하려 들지 않는 마음을 박해영 작가님의 글을 보며 배웠다.

평소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까지 만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나? 그러잖아도 호기심이 많은데 박해영 작가님이 그 영역을 더 넓혀준 것 같다. 그래서 산책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강아지나 고양이와 인사도 나눠야 하고, 모르는 식물을 발견하면 ‘모야모’ 앱으로 찾아봐야 하고, 사람도 관찰해야 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그와 대화도 나눠야 하고, 산만하고 바쁘다.

다양한 삶을 마주해야 하는 배우로서는 유용한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정도껏 하면.(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