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앰배서더로 선뜻 함께해주어 고맙다. 칸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제안받은 일화를 아는 터라 기쁘면서도 한편 놀랐다. 어떤 영화제든 초대받는 일은 영광스럽다. 후보에 오른 것으로도 이미 수상했다고 생각하고. 영화제 규모를 떠나 참석하지 못하면 이유는 촬영 일정 때문이다. 촬영을 우선하기 때문에 스케줄 조정이 되지 않으면 그곳이 칸이든, 베니스든 가지 못한다. 그걸 기본으로 한다.

<공기인형> <도희야> <브로커> <다음 소희> 등으로 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배우이기도 하다. 영화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니까 나 역시 영화인으로서 예의를 갖추고 싶다. 레드카펫에 오르는 걸 좋아하니까.(웃음) 초대받으면 한껏 멋 내고 가서 즐기고 온다. 하지만 작품에 등수를 매기고 상을 주는 데는 크게 관심이 없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까.

특별전을 준비하는 동안 배두나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며 새삼스레 감탄했다.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인 초창기부터 해외 영화 작업에 홀연히 참여하고, OTT 등 플랫폼에 대한 선입견 없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위에 자신을 놓았다. 마리끌레르 영화제 개막식에서 전달할 ‘파이오니어’라는 상패 타이틀에 누구보다 적합한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상 이름이 참 좋다.(웃음) 개척자… 한데 개척자는 보통 인정받지 못하지 않나. 길을 뚫고, 닦아놓은 뒤 그 길 위에서 다음 세대가 훨훨 날게 하는 역할이니까. 개척자가 되겠다는 의지나 계획이 있었다기보다 기질 자체가 누가 이미 지나온 길을 따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해외로 향하는 첫 발판이었을 영화 <린다 린다 린다>가 17년 전 작품이다. 지금은 해외 자본과 인력으로 이뤄진 현장에 한국 배우가 참여하는 일이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예측 불가능했을 텐데 어떤 마음이었나? 감독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린다 린다 린다>는 당시에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전작을 보내줬었다. 비디오테이프로.(웃음) 저예산으로 촬영한 로드무비였는데 무척 흥미로웠다. ‘이 양반은 천재다’ 싶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두고두고 회자될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 믿고 그길로 일본으로 갔다. 만약 일본이 아니라 더 먼 아프리카에서 불렀
어도 갔을 것이다. <공기인형>이나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같은 이유로 참여했다. ‘내가 개척해야 해’, ‘오, 해외 작품!’ 하면서 참여한 적은 없다. 오직 감독을 따라 가는 여정이었다.

그 여정에는 짐작할 수 없는 고독과 어려움이 있었겠지.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 길이 험할 줄 알았는데 험했다고, 고생했다고 한탄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 또한 사람이니까 같은 고생을 또 하기 싫어 선택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적어도 투덜거릴 거면 애초에 선택하지 말아야겠지. 이왕 하기로 했고, 도장을 찍었으면 거기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장에 가기 싫어서 혼자 운 적은 있다. 밥 먹다 우는데 엄마가 옆에서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짐 싸!” 하시더라. 이런 집안 환경에서 커왔기 때문에 어디 가서 고생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근데… 사실 별로 힘들지 않다. 나는 연기하는 것만 엄청 좋아한다. 그 외에는 딱히 좋아하는 게 없다. 연기하는 순간, 카메라 앞에 있을 때만 행복하다. 그러니 현장이나 관계 등 그 외 부수적인 일은 배우로서 다 감수하는 거다.

 

기하학적 꽃 모티프 이어링, 커다란 스냅 버튼이 돋보이는 드레스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XXL 지퍼 포인트 개더 드레스 루이 비통(Louis Vuitton).

부드러운 카프스킨 롱 코트, 청키한 굽의 LV 줌 플랫폼 앵클부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트렌치코트, 새틴 스모크드 톱과 팬츠, 허리를 넓게 감싸는 벨트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커리어를 확장한 지난 여정이 인간 배두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은가? 맷집이 생기고 쉽게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됐지만, 글쎄… 인간 배두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경력이 쌓이고, 몇십 년 동안 대중 앞에 서며 인정받은 면도 있지만 그런 성취가 나라는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어느 부분에서는 소녀 같은 면이 있고, 이상주의자다. 의식적으로 닳지 않게 하려는 면도 있지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다지 차이가 없다. 배우 배두나는 내가 봐도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 하지만 그 외 인간 배두나는 그냥 바보다.(웃음) 점점 더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한데 이게 더 편하기도 하고.

배우 배두나가 귀한 건 제작비 5억원 규모의 <도희야> 속 시골길 위에 서 있을 때도, 넷플릭스 역대 최대 제작비를 투입하는 오리지널 시리즈 <레벨 문> 속에서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과 규모, 장르와 플랫폼, 역할의 경중에 연연하지 않고 드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자유롭다. 양극을 오가는 희열이 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에 가치를 두기도 하지만 블록버스터나 액션영화가 지닌 미덕을 무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나를 액션 배우로 알기도 하니까.(웃음) <레벨 문>은 아주 큰 작품이다. 세트를 부러울 만큼 짓더라. 허허벌판에 마을을 하나 세우더니 밀을 심고, 밀이 다 자랄 때까지 7~8개월을 기다렸다가 촬영을 시작한다. 그리고 호수를 막 파, 그 호수에 배우가 들어가야 하니까 열선도 깐다. 좋은 경험을 하고 왔다.(웃음)

극단의 현장을 오가며 느끼는 괴리감은 없나? 한번 경험해봤으면 됐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 자본력이 한국 영화 현장에도 투입된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 할리우드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한국 영화는 막대한 자본력 없이도 이룩한 성취가 있지 않나. <킹덤>을 촬영할 때, 포천의 비둘기낭폭포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기온이 영하 10℃ 아래로 떨어진 때였는데, 뭐 어떡해 들어가야지. 근데 무엇보다 그게 그다지 힘들지 않다. 별명이 ‘무통’이다. ‘무통 배두나’.

장소적 특성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만난, 국적을 막론한 사람들로 부터 얻은 것과 그로 인한 변화도 있을 것 같다. 맞다. 지난 30대는 내게 탐험의 시간이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 촬영 이후 해외 활동을 하고 영화와 패션 등 경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좁은 우물 속에서 살았구나 싶었다. 한국에서 30년을 살았고, 정규교육을 받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 10년간 그 깨달음 속에 살았다.

변화의 기점이 있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베를린에서 4개월간 촬영했는데, 그때는 영어를 못했으니까 영국인 다이얼로그 코치 집에서 하숙했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었다. 무명 시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대접만 받고 살다가 아주 오랜만에 지극히 보통의 삶으로 돌아간 거다. 근데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마 한국에서는 내 부재를 잘 몰랐을 거다. 당시 중간중간 <코리아> 등 영화도 개봉하고, 화보도 찍고 돌아가고 했으니까.

루이 비통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도 삶에서 중요한 이 중 한 명일 것 같다. 니콜라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다. 나보다 영화를 많이 보고, 미술과 건축 등 문화적 인풋이 풍부해 내게도 좋은 영감을 준다. 그가 영화 <괴물>을 좋아해 2014년쯤 처음 만났다. 그때 그 친구가 루이 비통에 막 합류했을 때였을 텐데. 코로나19 이전에는 함께 휴가도 자주 갔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다. 사람이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않나. 나도, 그 친구도 그 부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겉모습과 상관없이 만나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가끔은 서로 힘든 이야기를 편히 할 수 있는 아주 고마운 친구다.

 

다채로운 스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어링, 울 오프숄더 드레스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LV 에얼룸 이어링, 큼직한 지퍼와 허리끈 디테일이 특징인 드레스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최근에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 전, ‘다음 소희법’이라고 불리던 ‘현장실습생 보호법’(직업교육훈련촉진법 개정안, 위원회 대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아왔지만 영화로, 연기로 직접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하소연하고 다녔는데, 바꾸더라.(웃음) 아직 얼떨떨하다.

영화 <다음 소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정도 변화를 기대하지는 못했나 보다. 뭔가를 해보자, 바꾸자 하는 야심 찬 계획으로 시작한 건 아니니까.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의미를 두고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볼 수 있게 하려면 상업영화로, 상업적인 극장에서 개봉해야 하니까 내가 역할을 맡는 게 좋겠다 하는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했다. 이 정도로 관객이 함께 분노하고 공론화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법안이 발의될 정도로 이슈가 된 건 팬들의 힘인 것 같다. 스피커가 돼 이야기를 널리 전해줬다. 얼마 전에는 사법연수원에서 <다음 소희>를 단체 관람하겠다고, 참석할 수 있겠느냐고 연락이 왔다.

참석하겠다고 했나? GV(관객과의 대화) 하겠다고 했다. 판사들이 보면 좋으니까. 할 말도 좀 있고. (웃음)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두고 액티비스트는 아니라고 했지만, 배우라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소심하게, 작게 행동하는 스타일이다. 목적을 가지고 발언하고,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대해서는 조심스러워하는 편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알게 모르게 스며들게 하는 게 내 성향에 맞는 것 같다. 내 연기 스타일도 그렇고. 주장하고 크게 외치지 않아도 내가 양심껏, 조금은 고지식하게 살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 배우 일을 하고 있으니 작품으로 그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몸에 붙는 비스코스 크레이프 저지 소재 드레스, 물결 모양 밑창이 매력적인 부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섬세하고 아티스틱한 주름이 잡힌 홀터넥 톱 루이 비통(Louis Vuitton).

울 크레이프 트라페제 플리츠 드레스 루이 비통(Louis Vuitton).

드롭 이어링, 구조적인 실루엣의 XXL 지퍼 포인트 사이드 타이 드레스, 로맨틱한 플로럴 모티프 레깅스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

 

20~30대에 배우 배두나를 이끈 동력과 지금의 배우 배두나를 이끄는 동력이 달라진 것을 느끼기도 하는가? 예전에는 가족이 동력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내가 중요해졌다. 누구보다 스스로 나를 만족시키고 싶다. 그래서 일하고, 더 좋은 일을 하고 싶다. 좋은 작품과 연기에 굉장히 까다롭고 철저했다면 요즘은 조금씩 관대해지고 있다. 스스로에게 부담을 크게 주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그로부터 느끼는 자유도 있다.

그 흔한 흑역사 하나 없이 20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수긍할 필모그래피를 만들어왔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순간 자신을 최대치로 써온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자족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진 않나? 만족할 수 없는 부분은 당연히 있다. ‘음, 내가 저렇게 연기를 했던가?’ 싶은 장면들도 물론 있다. 근데 그에 대해 자책하거나 골몰하는 성향은 아니다. 그 당시 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갔고, 나를 다 썼다. 될 때까지. 더는 못 했으니 불만족할 일은 아닌 거다. 적어도 현장에서 ‘아, 이따 데이트해야 하니까 대충 끝내자’ 한 적은 없으니까.(웃음) 만약 내가 불성실했다면 크게 자책하겠지. ‘너 왜 연기 하니? 왜 사니?’ 하면서. (잠시 침묵) 근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편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우리 세대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듣고 자랐다. 다음 세대는 그냥 있는 그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다. 최고치로 자신을 쓰고 있다는 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이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이기도 하니까. 오랜 시간 연기만 해왔으니까. 오히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다채롭게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나는 더 부럽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한데 배두나 배우의 최선과 열심은 책임과 의무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외려 배우라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연기를 안 했다면, 마음속 응어리를 풀 수 없었다면 더 답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배우로서 누군가의 인생을 사는 동안에는 나 자신을 잊으니까 마음이 정화된다. 배우라는 직업을 꿈꿔온 건 아니고, 우연찮게 이 길에 접어들면서 운이 좋았다. 지금도 얼마나 소중한 직업인지 매 순간 느낀다. 배우들은 현장에서 다음 장면 세팅을 위해 대기하는 시간이 있다. 그러다 ‘배우 들어갈게요’라는 부름에 촬영장으로 걸어 들어갈 때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듯, 이상한 판타지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환상적인 경험을 한다. 그 순간 늘 고맙다고 느낀다. 내 인생은 정말 멋지구나 하고.

 

반짝이는 새틴 톱 루이 비통(Louis Vuitton).

킬트 스커트 디테일을 대형 플랫 플리츠로 재해석한 드레스 루이 비통(Louis Vuitton).

크림색 카프스킨과 블랙 램스킨을 조합한 A라인 드레스, 플랫폼 사이하이 부츠 모두 루이 비통(Louis Vuit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