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두렵고 힘들고 상처도 받지만
아직은 현장에 나가는 게 너무 좋고,
그곳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아요.”

 

수트 디올(Dior), 블랙 스웨이드 첼시 부츠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브라운 셔츠 렉토(Recto).

 

제10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연출작 한 편과 출연작 세 편을 모아 ‘박정민 단편전’을 엽니다. 영화제에서 배우 겸 감독으로서 본인의 이름을 건 기획전을 여는 건 어떤 마음일지 궁금했어요.

민망하고, 민망합니다.(웃음) 사실 배우전을 열 작품을 골라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냥 제가 좋아하고 재미있게 본 영화를 고르면 되는 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제 영화를 상영하는 거라 엄청 부끄러웠고요. 어쨌든 그간 극장에서 보기 힘들던 영화를 보여드리는 건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 제가 좀 민망하더라도 관객을 위한 자리라 생각하고 그에 맞는 작품들을 찾았죠.

 

네 편의 단편영화를 골랐어요.

장편영화는 많든 적든 극장에서 선보일 기회가 있었는데, 단편영화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큰 화면으로 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정했습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가 만든 <반장선거>를 상영했는데, 배우들의 연기나 제가 의도한 편집 방향이 극장에서 큰 스크린을 통해 보니까 훨씬 잘 보이고 좋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한 번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2007년 <세상의 끝>부터 2014년 <유령(신촌좀비만화)>, 2016년 <앰부배깅>, 그리고 2021년 <반장선거>까지. 박정민 배우의 타임라인을 볼 수 있겠다 싶은 구성이에요. 여러 시기의 작품으로 구성해야겠다는 의도가 있었나요?

의도한 건 아닌데 어떻게 하다 보니 타임라인이 읽히게 되었네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려 하기보다는 제 인생의 변곡점이 된 영화들을 떠올렸어요. <파수꾼>에 캐스팅된 건 <세상의 끝>이라는 영화 덕분이고, 이준익 감독님이 저를 인식하게 된 작품이 <유령(신촌좀비만화) >이고 그로 인해 <동주>에 출연할 수 있었어요. <앰부배깅>은 제가 무척 좋아하고 주목하는 젊은 감독이 만든 영화고, 함께 작업하면서 한정재 감독과 나눈 대화들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 얘기를 해보고 싶어 골랐어요. <반장선거>는 제가 처음으로 연출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요. 그렇게 각각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영화예요.

 

한 작품씩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세상의 끝>이 16년 전 작품이더라고요. 필모그래피상 데뷔작은 <파수꾼>이지만, 연기를 한 진정한 첫 작품은 <세상의 끝>인 셈이에요.

촬영은 17년 전에 했는데, 딱 이맘때였어요. 스무 살 때 연기라는 걸 해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경북 울진까지 선배들 쫓아가서 촬영한 기억이 나요. 남궁선 감독님은 저를 캐스팅했다고 기억하는데, 사실 제가 졸라서 참여한 거였어요.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애가 하고 싶다고 하도 조르니까 대사가 없는 역할을 주셨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할이 주인공이었던 거죠.(웃음) 어디를 바라봐라, 가만히 있어라, 먹어라, 이렇게 어린아이 대하듯 디렉팅을 하셨고, 저는 충실히 따르기만 했던 것 같아요.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무작정 뛰어든 후엔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그때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돌이켜보면 그건 스무 살의 과욕이자 치기였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 주목받을 수 있으니까 관종 짓거리를 좀 해본 거죠. 본격적으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시간이 더 흘러 연기과로 전과하고 나서야 들었어요.

 

워낙 오래전 작품이라 당시의 감상과 지금 보이는 건 또 다를 것 같아요.

다르죠. 그 영화 찍고 군대에 간 터라 백일 휴가 나와서 처음 봤어요. 감독님에게 DVD를 받아 집에서 틀었는데, 정말 못 봐주겠다 싶었어요. 너무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다시 보니까 그간 제가 한 연기 중에선 제법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말없이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으니까 나름대로 그럴싸해 보인다 싶은 거죠. 이런 면을 보고 윤성현 감독님이 <파수꾼>이라는 영화에 캐스팅하셨나 보다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기도 했고요. 물론 연기를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요.

 

말 한마디 없던 ‘소년’ 역할을 지금 다시 해보면 어떨까요?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당연히 더 잘할 수는 있을 거예요. 다만 그때의 느낌은 나지 않겠죠. 아무리 기술이 늘고 아는 것도 많아졌다고 해도요. 만약 지금 <세상의 끝>을 다시 찍는다면, 아마 <파수꾼>에 캐스팅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확실합니다.(웃음)

 

 

트렌치코트 아미(Ami), 블랙 니트 톱과 팬츠 모두 프라다(Prada), 아이보리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블랙 니트 톱과 재킷, 팬츠 모두 프라다(Prada), 아이보리 스니커즈 컨버스(Converse).

 

네 작품 중 관객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유령(신촌좀비만화)>이 아닐까 싶어요. 영화 팬 사이에서 제목처럼 어딘가에 떠돌기는 하나 실제로 보기는 굉장히 어려운 작품으로 유명하잖아요.

맞아요. 아마 한국영상자료원에 가야 볼 수 있을 거예요.

 

찾아봤는데 그곳에도 없었습니다.(웃음)

아, 그래요? 3D를 토대로 작업한 영화라 그럴 수도 있어요. 저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 번 보고 못 봤어요. 이 영화를 고른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해요. 제가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워낙 구해서 보기 어려운 영화니까 기회가 있을 때 보여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저 역시 다시 보고 싶었고요. 류승완 감독님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작품인 데다 작업 방식이 꽤 재미있었는데 내용이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아 아쉽더라고요.

 

다는 아니어도 당시 맡은 ‘비젠’이라는 인물이 마지막에 결국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할 것 같아요. 후반부에 깜짝 놀랐거든요.

누군가를 죽이지 않나요?

 

맞아요. 가상 세계와 현실의 괴리가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어긋날 수 있는지 보여준 장면이라 생각해요. 보면서 비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꽤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상 세계에 갇혀 사는 10대 청소년의 현실을 보여줘야 했으니까요.

초반에는 뭘 어떻게 접근을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감독님하고 얘기를 많이 나눴어요. 그 당시에는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그 친구의 버릇이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사실 이렇게 인물의 특성을 만드는 건 재미있었는데, 오히려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움직이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 안경을 끼면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인물의 행동을 잘 표현하고 있는 건지 어떤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런 애로 사항이 좀 있었어요.

 

류승완 감독님과 함께 한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 점도 있었나요?

엄청 설레었죠. 손에 꼽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준비한 영화예요.(웃음) 당시에는 말 그대로 감독님 눈에 들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부단히 애를 썼죠. 그 모습을 예쁘게 봐주신 덕에 지금까지도 여러 작품으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싶어요.

 

<앰부배깅> 역시 귀한 인연이 이어준 작품이라 들었어요.

이 영화를 만든 한정재 감독은 <구급>이라는 단편영화에서 처음 만났어요. 영화도 좋았지만, 그 친구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생각이 참 좋아서 이후에도 인연을 맺고 작품은 같이 하지않더라도 계속 서로 응원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어요. 그리고 몇 년 후에 한 감독이 자기 할머니 이야기를 만들 거라며 새 영화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기획 단계에서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에 관해 들려줬는데, 사실 그 당시에 저는 100% 공감하지는 못했었어요. 그래도 지지하는 친구의 영화이니, 작은 역할로 참여했는데 결과물을 보고 좀 놀랐어요. 이 친구가 얘기하고 싶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공감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좀 부끄럽더군요. 23분 분량의 영화에 납득하지 못했던 어떤 이야기를 이해시키는 힘이 담겨 있더라고요. 도와달라는 말에 잠깐 가서 연기한건데, 의외로 꽤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 된 것 같아요.

 

그 점이 잘 만든 단편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보는 건 잠깐이어도, 관객은 이야기를 놓지 못하고 계속 상상하고 이해하려 하죠.

메시지가 짧고 간결하니까 그 메시지에 파장이 인 사람들은 계속 상상하면서 질문을 붙이는 거죠. 인물 간의 관계성을 그려보고,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 생각해보면서요. 맞아요, 그게 단편의 매력인 것 같아요.

 

가장 묻고 싶은 게 많은 작품은 첫 연출작인 <반장선거>입니다. 이전의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니 ‘감독이 되고 싶다’, ‘단편영화 하나 찍어보고 싶다’는 얘기를 적잖이 했던데요.

제가 그랬나요? 왜 그랬을까요?

 

꽤 여기저기서 그 소망을 언급했던데요.(웃음)

아마 그런 말이었을 거예요. ‘연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라는 질문에 ‘없다. 그런데 한다면 단편영화는 찍어보고 싶다’ 하는 정도의 대답이었을 거예요. 써둔 시나리오가 있긴 했지만요.(웃음) <반장선거>도 원래는 안 했을 건데 (이)제훈이 형이 제작사를 만들어 하는 첫 프로젝트라 거절할 수 없어 하게 됐어요.

 

 

수트 디올(Dior), 블랙 스웨이드 첼시 부츠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수트 디올(Dior), 블랙 스웨이드 첼시

 

<반장선거>의 시나리오는 언제 써둔 거예요?

2011년? 2012년 즈음? 되게 오래전에 써놓은 시나리오예요. 아이들이 반장 선거하는 사건이 시작이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초등학교 때 학기마다 벌어지는 반장 선거가 되게 치열했어요. 어른들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요. 저에게는 충격적인 기억이라 그걸 소재로 이야기를 써둔 게 있었어요.

 

초고 단계부터 장르는 누아르였나요?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축축하고 눅눅한 무드가 담겨 있어요.

그건 영화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면서 정한 거예요. 초고는 애들끼리 활발하고 경쾌하게 투닥거리면서 반장 선거를 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원래는 선생님이 등장해 아이들의 어떤 비리를 파헤치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영화로 만들려다 보니 어른이 나오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다 빼고 아이들로만 가기로 한 뒤 주축이 되는 아이의 심리와 정서를 생각해봤는데, 좀 눅눅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조도를 낮추고 비도 뿌리면서 누아르 무드가 더해진 것 같아요. 사실 마지막까지 고민한 게 비였어요. 예산이 빠듯했거든요. 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게 비였는데, 운 좋게도 때마침 비가 내려줬어요.(웃음) 정말 다행이었죠.

 

러닝타임에 대한 고민도 많았을 것 같아요. 단편영화 특성상 더하기보다 덜어내는 게 어려웠으리라 짐작되는데, 담지 못해 아쉬운 장면도 있었나요?

그 반대였어요. 영화가 24분 분량인데, 저는 20분 안쪽으로 들어올 줄 알았거든요. 단편영화는 길면 재미없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 기준이 저한테는 20분이었어요. 그런데 주축이되는 인물의 행동을 관객이 어느 정도 납득하게 하려면 계속 붙여야 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또 반 아이들 27명을 웬만하면 한 명 한 명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어쨌든 출연한 아이들 입장에서는 한 컷이라도 영화에 나오면 좋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배려도 해야겠다 싶었어요. 제가 이걸로 무슨 팔자를 고치려고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웃음) 그러다 보니 한 4분 정도 길어지더라고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한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뿌듯했어요. 이 영화를 잘 만들었다 이런 느낌이 아니라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쨌든 세상에 내놨다, 내가 이 돈을 갖고 도망가진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나오는 뿌듯함이었어요.

 

예산과 러닝타임을 차치하고도 더 큰 마음고생이 있었던 거죠?

학교 다닐 때야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대부분 용납이 되지만, 이건 아무리 처음이라도 너무 많이 실수하면 의미가 없는 작업이기 때문에 오류를 최소화하려고 애썼거든요. 그런데 촬영본을 가지고 편집하려고 보니까 제가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질렀더라고요. ‘내가 많은 걸 모르고 있었구나’ 싶은 거죠. 저예산영화치고 등장인물이 많은 데다 애들 부모님까지, 현장에 사람이 무척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출연료 얼마 쥐여주고 이 고생을 시켰구나 싶어 괴롭더라고요. 이 실수를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달 동안 매일 컴퓨터 앞에서 그 생각에 골몰하느라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현장에 가는 게 두려울 때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때보다 더 두렵고 무서웠을 것 같아요.

훨씬 무섭죠. 그때 처음으로 ‘배우는 현장에 그냥 왔다 가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가기는 하지만, 감독은 배우나 스태프가 떠난 후에도 이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계속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 경험이 이후 배우로서 영화에 임할 때 가진 생각이나 태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반장선거> 찍고 바로 들어간 게 영화 <밀수>인데, 현장에서 감독님 모습을 보면서 제가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배우는 연기만 하면 되지만, 감독은 하루에도 수백 번 선택하고 결정해야 되는데, 내가 그 과정을 지연시키는 순간 너무 힘들어질 게 보이기 시작한 거죠.

 

작업하며 ‘감독으로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배우로 임할 때와 비슷한 모습인가요? 아니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나요?

‘촬영할 때는 수치심이 없어지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현장을 빠르게 제대로 끌고 가려면 내가 버티고 주저할 게 아니다, 그러면 큰일 난다 하는 마음을 갖고 나니 나서서 부딪치고 먼저 해보고 안 되는 건 먼저 고개 숙이고 큰 소리로 사과하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이 나온 영화니까 더 그랬겠죠. 애들이 부끄러우면 연기를 안 해요. 그래서 그걸 풀어주려면 내가 먼저 부끄러워져야 돼요. 감독이라는 사람이 이미 부끄러운 짓을 해야 아이들이 용기를 얻고 연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현장에서 더 소리 지르고 같이 춤추고 그랬어요.

 

듣기만 해도 감독으로 영화 한 편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싶어요.(웃음) 그럼에도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 기회가 또 주어지면 할 건가요? 당분간은 안 합니다. 아예 안 하겠다는 말은 아니네요.

막 만들었을 때는 당장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제가 공부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도 공부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네요. 감독은 영화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사람도 알아야 하고 자본도 알아야 하고, 알아야 될 게 아주 많아요. 쉽게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수트 디올(Dior), 블랙 스웨이드 첼시 부츠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배우로 나온 작품은 잘 못 보는 편이라 들었어요. <반장선거>는 어떤가요?

연출을 하면 어쩔 수 없이 많이 보게 돼요. <반장선거>는 제가 제일 많이 봤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수없이 보니까 이 영화의 모든 존재를 사랑하게 되더라고요. 예전에 감독님들이 ‘정민 씨 얼굴을 한 천 번쯤 보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집하다 보면 이 사람을 그냥 사랑하게 된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그 느낌을 알게 됐어요. 그렇지만 배우로 나오는 작품은 시사회 때 한 번 보고 이후 5년간은 안 봅니다.

 

안 보는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인가요?

괜히 이미 다 끝난 걸 가지고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내가 왜 거기서 그걸 못 했지?’ 이런 생각을 굳이 할 이유가 없잖아요. 한 5년 있다가 돌아보면 ‘아, 그래. 그때 내가 어렸으니까’ 하고 퉁칠 수 있는데 개봉 당
시에 보면 자괴감만 계속 드는 것 같아요. 세상 어느 배우가 자기가 나온 영화 보면서 완벽히 만족하겠어요. 못하는 것만 보이지.

 

다시 보니 <반장선거>를 제외한 세 작품 모두 5년 이상 지난 영화네요.(웃음)

맞아요.(웃음) 최소 5년 이상은 흘러야 그때의 나를 다독이면서 너그럽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과정은 두렵고 괴로운 데다 결과물을 마주하는 것도 쉽지 않음에도 영화를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 일의 가장 큰 기쁨이요.

저는 그럼에도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물론 두렵고 힘들고 상처도 받지만 아직은 현장에 나가는 게 너무 좋고, 그곳
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뭔가를 만드는 게 좋아요. 꿈을 이뤘다고 얘기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꿈꾸던 일을, 게다가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게 복이지 않나 싶어요. 만약 이게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러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죠.

 

방금 대답할 때 표정이요, 정말 즐거워 보였어요. 배우 박정민의 영화를 더 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웃음) 아직은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