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퍼 이자벨 마랑(Isabel Marant), 니트 톱 모스키노(Moschino), 팬츠 시도즈(Xidozu), 레이스업 부츠 닥터마틴(Dr. Martens), 링 모소(Mosso), 네크리스 케이브이케이(KVK).

 

2019년 발표한 싱글 <mama, see> 이후 4년 만에 새 앨범 <o, pruned!>를 공개했어요. 의도한 시간이었나요? 지난 4년간 팬데믹의 영향으로 작업 공간에만 머물게 되는 날이 많았어요. 때로는 음악을 만드는 일이 지치기도 하고,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부딪히고, 좌절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음악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고민도 했고요. 그렇지만 제가 그런 시간을 겪을 때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는 친구들이 있고, 그 친구들과 음악을 만들어나가면서 어느샌가 작업물이 꽤 쌓이게 되었죠. 다만 그 과정에서 1집을 만들 때와는 달리 프로듀싱에 참여하거나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잼을 하기도 했어요. 이렇듯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면서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

다시 음악 작업을 시작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이번 앨범의 발화점이 된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번 앨범을 만드는 데 제일 중요한 인물이 한 명 있어요. 그간 저와 공연도 같이 하고 작업도 많이 해온 동료이자 아주 가까운 친구인 짐조니(gimjonny)라는 기타리스트요. 이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적이 있어요. 기타도 버려두고 아무에게도 연락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나버린 거예요. 그 뒤 8개월쯤 흘렀나? 조니가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서 자신의 사라짐에 관해 얘기해주었고, 그게 이 앨범의 시작이 되었어요.

그래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음악에 담은 거죠? 앨범 소개 글에 ‘가지가 잘려 나가듯 단절된, 상처받은 친구들, 하지만 저에겐 오롯이 사랑만을 전해준 소중한 친구들에게 바칩니다’라는 글귀를 적어두기도 했고요. 그간 제가 친구들 사이에서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하는 편이었어요. 조니의 사건을 포함해 일련의 일을 겪다 보니 이런 제 성향이 친구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어둡지만은 않은, 희망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O, Pruned!’라는 제목은 가지가 잘려 나가듯 단절된, 상처받은 친구를 부르는 저만의 한 방법이에요. 세상을 이미 떠난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모든 걸 단절한 채로 떠나고 싶어 했던 친구에게 보내는 이야기, 또 제가 그 친구들과 비슷한 기분을 느낄 때 저를 도와줬던 친구를 떠올리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요.

제이클레프에게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요? 주변에 음악 하는 친구가 많아요. 음악적으로 무척 긴밀한 관계이고, 그래서 서로 필요에 의해 만날 때도 있지만 제게 친구들은 그 이상의 존재예요.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잘 살아나가게 해주는 사람들이거든요.

내용도 그렇지만 사운드 면에서도 이전 앨범과 많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변화를 시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첫 앨범을 낸 후에 여러 앨범들을 듣다 보니 본인만의 사운드를 가진 아티스트들이 굉장히 부러워졌어요. 특히 관심이 간 사운드는 조금 어설프고, 짜깁기된 듯한 사운드인데요. 함께 음악을 만드는 친구들끼리는 그걸 섭섭한 사운드라 표현하곤 해 요. 주파수 범위가 넓은 음악이 많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것이라면, 저희가 좋아하는 건 주파수 범위가 좁고 음량이 작은 소리들로 이루어진 음악이에요. 이런 완벽하지 않은 사운드가 어딘가 러프한 제 목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고요. 완벽하고 풍성한 사운드를 만드는 게 지향점이 되는 시대에 오히려 반대로 가는 작업인 셈이지만, 음악에 담겨 있는 소리들을 어울리게 하는 것이 제 감정을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도적으로 부족하게, 러프하게 만드는 작업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지난해 11 월에 발매한 김아일님의 앨범에 참여했는데, 그때 작업하면서 누구는 장난감 신시사이저를 사오고, 누구는 어린이용 건반을 가져오고, 누구는 최신 기기를 가져와서 놀듯이 음악을 만들곤 했어요. 오늘 촬영에 쓴 오르가넬 마이크도 굉장히 좁은 영역의 주파수만을 얻을 수 있는 장비인데, 이런 것들을 써보면서 러프한 사운드를 만드는 방식을 익히고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EP라는 앨범 단위도 처음 시도해보는 형태죠? 정규 앨범이나 싱글 앨범이 아닌 EP로 완성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이 앨범은 계획에 없던 거예요. 정규 2집을 준비하고 있었거든 요. 1집처럼 미니멀하지도 않고, 가사가 막 쏟아지는 형태와도 완전히 다른 묵직한 무언가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어요. 아름다운 곡들을 만들어서 기쁘지만, 한편으론 시간이 지체되면서 지치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조니가 사라졌고요. 저도 힘든 데다 같이할 사람도 없어졌으니 잠시 보류하자 싶었어요. 시간이 흘러 조니가 돌아왔을 때, 돌아온 것만으로도 더없이 신나고 좋더라고요. 이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조니와 김아일님과 함께 프로듀싱한 짧은 EP를 만들어보자 해서 이번 앨범이 나오게 됐어요.

 

패딩 베스트 막시제이(MAXXIJ), 링 모소(Mosso), 네크리스 케이브이케이(KVK), 패턴 티셔츠는 스타일리스 소장품, 손에 든 마이크는 본인 소장품.

 

새로운 방식이나 형태를 시도한 결과를 선보이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드나요? 제가 원래 스튜 디오에 혼자 처박혀 머리칼을 쥐어뜯으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인데,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만큼은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김아일 님(앨범 프로듀서)과 엡마(톤 마이스터), 박동진 님(엔지니어)은 항상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고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앨범에 대한 제 생각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곡을 만들고 녹음할 때 담은 감정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통해 마무리 단계에서 더 증폭되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어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럼 앞으로도 같은 방식의 작업을 이어가게 될 것 같나요? 아니면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갈까요? 정규 2집은 또 혼자 머리를 쥐어짜면서 만들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엔 많은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할 거예요. 음악은 저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첫 앨범 <flaw, flaw>를 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음악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나요? 확실히 달라진 건 지금 받아들이는 음악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는 점이에요. 이것 역시 음악을 같이 만드는 친구들의 영향이기도 해요. 그래서 앞으로 낼 정규 2집은 1집이나 EP와도 다른 모습일 거예요. 그 반면에 여전히 변하지 않는 부분은 제 음악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떤 감정에 푹 빠지거나, 반대로 쌓여 있는 무언가를 해소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제 음악이 듣는 사람에게 유용했으면 해요.

그렇다면 제이클레프의 음악은 계속 변화하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는 형태이길 바라나요? 어쩔 수 없이 계속 변할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이 변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앨범만 보아도, 제가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만들지 않았을 것 같은 곡들이 실려 있거든요. 새로운 무언가를 접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에 가고 이런 것들에 따라 취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요. 그렇게 그때마다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을 음악으로 표현하니, 제 음악에서 변화는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