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각하는 옥분의 매력은 뭐든지 열심히, 최선을 다한다는 점이에요. 다방도 열심히 꾸리고, 언니들과 작당 모의 끝에 주어진 역할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요. 심지어 나이트클럽에서 춤도 누구보다 가열차게 추잖아요.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아요. 맞아요.(웃음) 되게 열심히 해요. 대사가 없는 부분에서도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는 인물로 그려지잖아요. 그리고 춤은…(웃음) 그것도 수중 신처럼 다 같이 배운 거예요. 해녀 언니들이랑 핫빙달(핫바지, 빙다리, 달건이), 갈고리 오빠들과 이은하 선생님의 ‘밤차’에 맞춰서 춤 연습을 했어요. 그게 일명 ‘찌르기춤’인데, 당시엔 안 춰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시대를 장악한 춤이었대요. 춤추는 장면 찍을 때는 하나같이 거의 무아지경이었어요.
실제로 촬영장에서 옥분이 못지않게 열성을 다하는 배우였다고 들었어요. 모니터를 워낙 열심히 봐서 스태프들이 그만 보라고 애원할 정도였다고요. 사실 모니터를 보는 건 최선을 다하려는 태도에서 발현된 게 아니라 그냥 보는 게 재미있어서예요. 이 장면들이 어떻게 편집될지 혼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감독님의 디렉팅을 통해 캐릭터들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보는 게 즐겁거든요. 어깨너머로 많이 배우기도 하고요. 저의 최선은 사실 모니터를 보기 전에 다 쓰여야죠. 맡은 역할을 철저하게 파악하며 준비하고, 카메라 앞에선 캐릭터에 제대로 몰입하고, 감독님의 디렉팅을 빠르게 흡수해내는 것이 배우의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최선을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쪽과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는 쪽 중 어느 편에 가깝나요? 마음은 후자인데, 사실 최선을 다하면 티가 날 수밖에 없어요. 딱 보여요. 이 사람이 사력을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 아마 최선은 진심과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몸을 써야 하는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티가 나길 바랄 때도 있어요.(웃음)
류승완 감독부터 김혜수, 염정아, 김종수, 박정민 배우 등. 함께한 이들의 이름을 읊어보니 고민시 배우에게는 배움이 넘치는 현장이었겠다 짐작하게 됩니다. 보물찾기 게임에서 가장 많은 아이템을 획득한 기분이었어요. 한 분 한 분께 배운 게 참 많아요. 절대 블랙홀만 되지 말자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제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분이 배려하고 아껴주셨어요. 연기는 물론이거니와 삶의 지혜도 많이 얻었고요. 옆에서 듣고만 있어도 배우게 되는 이야기가 매일 샘솟는 현장이었달까요.
엄청난 내공을 지닌 배우들 사이에서 단단하게 존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영화에서 누구보다 또렷하게 존재하는 모습이 인상 깊어요. 작품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존재하기 위해 분투한 부분에 대해 들려준다면요? 말이었어요. 저는 어떤 역할을 맡든 대본에 쓰여 있는 활자를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는지에 중점을 둬요. 같은 문장도 어떤 식으로 내뱉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리 보이잖아요. 짧은 음절 하나도 그 캐릭터의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싶을 땐, 될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요. 모니터링하면서 가장 견딜 수 없는 순간이 내 말이 그 캐릭터의 말로 들리지 않을 때예요. 대사를 맛깔나게 내뱉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영화 <마녀>의 ‘명희’도, 드라마 <스위트 홈>의 ‘은유’와 <오월의 청춘>의 ‘명희’도 다 그만의 말맛이 있었네요. 군계일학은 옥분이고요.(웃음) 당돌하고 상스러우면서도 시원시원한 옥분의 매력을 살릴 말투를 찾아 다양한 버전을 두고 고민했어요. 특히 후반부에 “같이 죽자, ××××야!”라고 내지르는 장면이요. 저는 그게 옥분의 생활력과 전투력이 가장 돋보이는, 가장 옥분다운 말이었던 것 같아요.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며 또 한 가지 발견한 특징은 다작하는 편인데, 비슷한 결로 느껴지는 캐릭터가 없다는 거예요. 선과 악,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있어요.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욕심이 좀 있어요. 이런 건 가능할까? 이런 인물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질문에 계속 답을 찾는 거죠.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분들이 참여한다면,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라면, 명확한 메시지가 보이는 작품이라면. 이 중 하나만 해당되면 주저하지 않고 도전해요. 쉬는 것보다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게 좋기도 하고요. 그렇게 1970년대 바다 마을의 다방 마담까지 왔어요.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그동안 연기하면서 피를 묻히지 않은 적이 거의 없어서요.(웃음) 이제는 사랑 얘기를 해보고 싶어요. 오롯이 멜로만 존재하는 이야기요.
캐릭터마다 험난한 풍파를 겪기는 했네요.(웃음) 그래서일까요? 그 인물을 모두 소화해낸 고민시라는 배우는 꽤 명확하고 단단해 보여요. 제가 생각보다 우유부단해요. 명확하게 맺고 끊지도 못 하고요. 특히 작년이 제게는 엄청난 풍랑이었어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지 못했고,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내느라 급급했죠.
그 풍랑을 어떻게 지나온 건가요? 그저 어떻게든 돌파해내려고 부단히 애를 썼어요. 나중에 시간이 한참 흘러서 돌이켜봤을 때, 그 풍랑 속에 있던 날들이 저를 더 깊어지게 해준 시간이길 바라면서요.
그럴 땐 만났던 작품 속 인물들의 태도를 빌려와도 될 것 같아요. 하나같이 강한 내면을 지닌 인물들이잖아요. 맞아요. 현지(<시크릿 부티크>)처럼 지혜롭고, 명희(<오월의 청춘>)처럼 단단하고, 은유(<스위트홈>)처럼 쿨하고, 옥분(<밀수>)처럼 화끈한 사람이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이제 그렇게 나아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