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연기의신’을 꼽을 때 거론되는 특정 배우들이 있지 않나. 그 이름들 사이에서 이병헌 배우가 다른 건 방송국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로 연극으로 시작한 배우들이 영화에서 호평받다 보니 연극 무대가 배우를 단련하는 장으로 여겨지는데 TV 미니시리즈나 일일드라마 현장이 배우를 단련하는 방식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이병헌 배우가 그 대표적인 증인이기도 하고. 맞다. 지금의 TV 드라마 제작 환경은 영화 촬영 과정과 흡사하지만 예전에는 크게 달랐다. 우스갯소리로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하루에 수십 신을 촬영하고, 웬만하면 오케이고.(웃음) 가령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을 찍는데 각자 배경 빛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내 얼굴을 찍을 땐 오후인데, 그 사이 해가 져서 상대방 얼굴 배경은 밤인 거다. 조명을 켜도 배경은 깜깜하다. 그 정도로 정신없이 찍다 보면 순발력이 붙는다. 현장에서 생기는 어지간한 변수에 흔들리지 않고. 그래서 TV 드라마만 하던 배우는 영화 현장에 오면 ‘여긴 왜 이렇게 느리지?’ 느끼기도 한다. 감정을 계속 가져가야 하는데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희석되니까.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면 감정을 길게 유지하는 게 힘들다.
영화계에서 아이러니한 일로 송강호 배우가 연극영화 학과에 세 번 낙방했다는 것과 이병헌 배우가 KBS 공채 탤런트 시험에 꼴찌로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신인 시절 이병헌 배우에게 한 감독이 연기를 못 한다고 “이 작품은 내 데뷔작이자 은퇴작이다”라고 복창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오늘 같은 때가 올 거라 생각했나? 전혀 몰랐다, 전혀. 하도 혼이 나서 연기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건지. 탤런트 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내가 이 일을 직업으로 계속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훌륭한 배우가 될 거야’ 하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지금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TV에 내가 나온다’ 하는 정도였다. 심지어 1년이 지난 뒤에도 스스로 배우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재능이 있다? 그런 생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해야 하니까 하는 느낌이었다. 내 연기에 확신도 없고, 잘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경직된 상태였다.
변화의 계기는 뭐였나? 그렇게 별생각 없이 1년을 보냈는데, 어느날 굉장히 긴 신을 찍었다. 연기의 이성과 감성의 비율을 따지자면 오직 감성만 넘치는 순간이었다. 컷 사인이 났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다. 어떻게 연기했는지도 모르겠고. 근데 그 순간 기분이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 이런 순간 때문에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현장에서 칭찬도 받고, 나중에 방송 보면서 ‘나 제법 했구나’ 하고 느끼는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씩 이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게 시작이었다. 조금씩 나아졌다. 그제야 내 열정을 여기에 다 쏟아부을 만한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이병헌 배우가 몸담은 작품에 대한 평가는 편차가 있지만, 연기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다. 연기가 흠이 된 작품은 없다. 그 점에 배우로서 자부심을 느낄 것 같다. 반대로 혼자 잘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경험이 배우에게 좌절을 주지는 않았나? 음… 그건 내 옛날 작품을 안 봐서 그런 것 같다. (웃음) 많은 사람이 모여 하는 일이니 작품이 사랑 받지 못하면 배우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이 영화에 온 힘을 쏟은 이들이 지금 얼마나 실망하고 힘들어할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한데 선천적으로 스스로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생각하려는 면이 있다. ‘어떻게 계속 좋기만 할 수 있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수긍할 밖에’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기로 정해진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다음 작품에서 더 잘하면 되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집착이 없는 것 같다. 잘 집착하지 않는다.
이 순간 지금까지 맡은 무수한 캐릭터 중에 한 시절로 돌아간다면 누구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무래도 <달콤한 인생>의 ‘선우’가….(웃음) 오늘 촬영 분위기도 그랬던 것 같다. 음악도 (그 작품의) OST였던 것 같은데.
맞다. 그랬구나, 어쩐지.(웃음) 촬영하면서도 뭔가 내 영화에 나온 음악 같은데 했다. 나도 <달콤한 인생>을 꼽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게 가장 의미가 큰 영화니까. 하나를 더 꼽자면 <번지 점프를 하다>다.
왜 두 영화를 선택했나? 우선 두 영화의 정서가 참 좋다. <달콤한 인생>은 한 남자의 심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온전히 내가 다 짊어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심정적으로 더 깊게 빠졌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공동경비구역 JSA>가 끝나고 바로 찍었는데 그 영화가 김대승 감독님의 입봉작이다. 거기 나오는 배우들이 다 학생이었고, (이)은주 씨도 신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내쪽에서 ‘영화배우 이병헌입니다’ 하고 말하기가 민망한 때였다. 앞서 출연한 영화 네 편이 다 망하고 <공동경비구역 JSA>로 한 번 성공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나 말고는 다들 신인이라 많은 이들이 내게 의지했던 것 같다. 입봉을 앞둔 감독의 부담감을 옆에서 같이 느끼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시 학생들 촬영할 때 잠시 나와달라는 감독님의 부탁에 촬영이 없는 날에도 현장에 갔었다. 옆에서 보면서 슬쩍 한마디해주고.(웃음) 누가 보면 내가 그 영화에 투자한 줄 알았을 거다. 그만큼 마음을 많이 쓴 작품이라 유독 애착이 간다. 대박 난 영화는 아니지만 긴 시간 사랑받는 영화가 돼 다행이다. 긴 시간 사랑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거겠지.
배우의 성취감이란 어렵고 복잡하다. 상을 몇 개 받는다고, 읽지 못한 시나리오가 잔뜩 쌓여있다고 해서 성공한 배우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이병헌 배우를 두고 많은 이들이 성공한 배우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성공한 배우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 배우에게 ‘성공’이라는 수식을 붙이긴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어떤 작품이 끝났을 때 누군가 길에서 내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 이름을 불러줄 때. 적어도 그 작품에서만큼은 실패한 배우는 아닐 거다. 배우 인생이 성공했다기보다 그 작품에서만큼은 성공한 배우라고 말할 수 있겠지.
인터뷰를 준비하는데 오랜만에, 느닷없이 긴장되더라. 방금 한 말을 들으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병헌 배우는 캐릭터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면모를 추측할 수 없다. 실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 거다. 한데 이는 일전에 본인이 자주 언급한 배우의 신비감과도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방금 말한 성공한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물을 따라주는데 너무 손을 떨어서 컵 안에 들어간 물보다 컵 주변에 흘린 물이 더 많은.(웃음) “제가 따를게요” 하고 받아 들기도 한다. 또 친한 후배가 “형, 내 친구들이 진짜 팬이니까 한 번 만나주세요” 해서 같이 만나 밥을 먹는데 너무들 긴장해 밥을 제대로 못 먹더라. 그럴 때면 ‘내가 너무 누아르만 찍었나? 액션 영화를 많이 찍었나? ’ 싶었는데(웃음) 그 말대로라 면 성공한 배우인 것 같다. 배우에 맞는 삶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