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터틀넥 스웨터 랄프로렌 퍼플 라벨(Ralph Lauren Purple Label), 블랙 팬츠 톰 포드(Tom Ford), 더블브레스트 코트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블랙 부츠 까르미나(Carmina).

셔츠와 타이, 팬츠, 코트 모두 발렌티노(Valentino).

 

매년 늦여름이 되면 현장에서 만나는 영화 관계자나 매니지먼트 종사자들이 <마리끌레르 BIFF 특별판> 커버 배우가 누군지 물어본다. 올해는 이병헌 배우라고 하니 하나같이 수긍하더라. 이견이 없는 커버 배우. 그야말로 올여름 극장가를 평정했다. 그랬나?(웃음) 개인으로서는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나뿐 아니라 아마 지금 많은 영화 관계자가 느끼고 있을 텐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을 찾는 관객 자체가 크게 줄었다. <범죄도시 3>가 천만 관객을 동원했을 때 잠시 상황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지엽적으로는 제작자나 관계자들이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데, 사실 모든 영화인이 추이를 지켜보며 안타까워 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비롯해 시카고 국제영화제, 판타스틱 페스트, 취리히 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 잇따라 초청받고 있다. 오늘 아침에 토론토에서 귀국했다고 들었다. 지금껏 무수한 해외 영화제를 다녀왔음에도 배우에게 영화제는 여전히 설레는 곳인가? 굉장히 설렌다. 영화제작에 들어가면 촬영부터 홍보까지 기나긴 과정이 힘들고,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신경이 쓰인다. 그런 가운데 영화제에 초청받는 순간은 마치 보너스 같은 보상처럼 다가온다. 돌아보니 영화 <매그니피센트 7>으로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간 게 벌써 7년 전이더라.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 상한놈>으로도 토론토에 갔는데 그건 말할 수 없이 오래됐고.(웃음) 올해 새삼 느낀 건 특정 인종 구분 없이 세계인이 두루 우리 배우들의 이름을 외치고 환호한다는 사실이다. K-콘텐츠가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지금이야 한국 배우와 스태프가 해외 현장에서 작업하고 인정받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었지만, 15년 전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선구자격 배우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그때는 섬처럼 혼자 떠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한데 지금은 누구라도 다 알아볼 것만 같은 분위기다. 홀가분하게 즐기다 돌아왔다.

 

화이트 라운드넥 티셔츠 프라다(Prada), 선글라스 레이밴(Ray-Ban).

 

올해 ‘영탁’을 만나며 배우로서 다시금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엄태화 감독의 말로는 영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직선으로 뻗은 인물이었는데, 이병헌 배우가 변주하며 입체감을 부여했다고 하더라. 작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감독님과 상의하며 발전시킨 기억이 난다. 처음부터 영탁이 흥미로웠던 건 모든 것을 잃고,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인물에게 어느 순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큰 권력이 주어지면서 인물이 변화하는 영화적 상황 때문이었다. 선인인지, 악인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인물이지 않나. 적어도 영탁은 권력을 쥐었을 때 개인적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인이라고만 볼 수 없는 애매모호한 면이 있다. 우리 주변에 충분히 있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한데 이 영화는 영탁뿐만 아니라 캐릭터마다 감정이입이 가능한 영화라고 본다.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심지어 외부인들까지 ‘저런 사람 내 주변에 있어’ 하고 떠올릴 법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영탁을 만들어가면서 감독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 주민 투표 후 서명하며 이름을 적는데 그때 미음(ᄆ) 자를 먼저 적는 장면을 좋아한다. 평생을 ‘모세범’ 이라는 이름으로 산 사람이니까 무의식적으로 ‘ᄆ’ 을 쓰지 않을까? 서명하는 장면의 클로즈업 숏이 현장에서 만들어졌다. 근데 눈치를 채는 관객이 많지 않더라. 어떻게 생각하면 그 장면에서 다 알아채지 못한 게 다행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단서 중 하나는 김선영 배우가 연기한 아파트 부녀회장 ‘금애’가 “목사도 살인자도 모두 동등하다. 모두 리셋되었다” 라고 말할 때 잠시 영탁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지는 신이다. 관람 당시에는 지나쳤는데, 영화가 끝나고 복기하게 된다. 이렇게 단서가 되는 장면들이 거듭되며 보는 재미가 배가됐다. 그 장면도 현장에서 논의 끝에 탄생했다. 내가 가장 고민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신이다. 영탁이 살인을 저지르고 지진이 난 후 ‘살아서 뭐해’ 하고 망연자실해 있다가 바깥의 펑 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뛰쳐나와서 불을 끄지 않나. 집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다.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불을 끄고 나니 일순간 영웅이, 주민대표가 되어 있는 거다. 그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런 그에게 어떤 자극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앞서 행한 살인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 정도의 자극이 뭘지 감독님과 상의하다 선영 배우의 대사가 나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선에서 포커스만 잠시 맞추고 빼는 정도로 정리했다. 그렇게 작은 것들을 추가하며 다듬어갔다.

 

화이트 라운드넥 티셔츠 프라다(Prada), 블랙 팬츠 톰 포드(Tom Ford), 레더 재킷 발렌티노(Valentino).

 

영탁의 절정은 ‘아파트’ 노래를 부르는 장면 아닐까. 이병헌이라는 배우는 매 작품, 매 장면을 원 없이 연기한다.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 살아간다. 30년 넘는 시간 동안 천진하게 배우의 일을 사랑한다는 인상을 준다.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연기를 오래하다 보니 어떤 인물이나 장면 앞에서는 ‘아,이거?’ 하면서 반사적으로 예전의 연기를 꺼내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습관처럼 연기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거부한다. 마치 내가 처음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 같이, 처음 연기하는 사람처럼 임하려고 한다. 나도 모르게 쌓인 것들을 의식적으로 털어내려는 거다. ‘어떻게 하는지 다 알아’ 하고 목록에서 꺼내 드는 게 아니라.

애써 꺼내려 하지 않아도 손에 걸리는 것이 많은,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오지 않았나. 피하기도 쉽지 않겠다. 그렇게 관성적으로 연기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겠지. 신기한 건 애쓰지 않아도 새로운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익숙한 방식을 택하려 할 때 불현듯 화들짝 놀라는 거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고. 그래서 연기가 매번 어렵다. 심지어 연기라는 일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싶은.

막막한 기분이 든다는 건가? 배우 이병헌이? 오랜 시간 한 가지를 만들어온 장인의 습관 같은 것이 나오기도 한다. 알게 모르게 쌓인 노하우겠지. 하지만 연기라는 것은 기술직이 아니지 않나. 적어도 어떤 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내가 다른 인물이 되어 사는 건데, 그건 기술처럼 단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걸 어떻게 했었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깐이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막막한 순간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완전히 무의 상태로 돌아간 것 같은. 수영 선수나 태권도 선수 같으면 몸이, 근육이 기억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나오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표현하는 건 다르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다행히 그 당황스러움이 오래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