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영화가 되겠다 싶은 아이디어나 소재를 수집한다고 들었어요. 최근 기록한 소재에는 어떤 게 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사우나에 모래시계가 있잖아요. 서서히 떨어지는 모래를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와 탁 하고 다 떨어지지 않은 모래시계를 반대로 돌려요. 그 순간 ‘몇 분 몇 초’ 하고 누군가가 시간을 정확히 맞춰요. 모래알이 떨어지는 속도와 양을 순간적으로 파악하고 계산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는 거죠. 뭐 이런 미친 상상을 자주 해요.(웃음) 이렇게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 중에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은 단편적인 순간을 기록해두었다가 어떤 작품에 끼워 넣어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일하지 않을 때도 시간이 참 빨리 가요. 하하.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블루 해피니스> 다음 작품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매일 꿈은 꾸죠.(웃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데 잘하고 싶으니까, 그러려면 조금 더 내공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감독이라는 자리가 막상 해보니까 더 어렵고 막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숱하게 머물던 현장인데 카메라 뒤로 가보니 해나가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어요. 시간은 한정적이고, 사람들은 다 저만 바라보면서 제 선택과 결정을 기다리고, 그래서 모든 선택을 마쳤는데 그 결정끼리 맞물리면서 틀어지고 부딪치고. 한마디로 피가 마르는 시간이었어요. 더 공부해서 연출이라는 영역의 그릇을 더 넓힌 후에 도전해야 할 것 같아요.
제작자와 감독으로서 쌓은 경험이 배우로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최근작 드라마 <모범택시>를 예로 들면 ‘김도기’라는 인물이 지닌 매력 하나만 보고 선택하진 않았을 거라 짐작하게 돼요. 모두 사는 게 각박하고 답답하고 힘들잖아요. <모범택시>는 그 답답함을 잘 해소해주는 작품이에요. 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기대하는 부분은 어떤 건지 잘 파악해서 정확하게 부응하는 것도 상업 작품의 미덕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예전에는 작품을 선택하는 데 사유하게 하고, 그 결과 다른 시선을 갖게 해주는지가 주요한 요소였다면 지금은 관객이 얻고 싶어 하는 걸 충족하고 해소해주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그런 면에서 <모범택시>는 장점이 명확한 작품이에요.
세 번째 시즌 제작이 확정되었다는 기사를 접했어요. 시리즈를 이어간다는 건 설레고 기쁜 일이지만 걱정과 부담이 공존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선은 너무 기뻤어요. 사람들의 기대를 잘 충족하면서 사랑받는 작품이길 바랐는데, 그 바람이 이뤄진 거니까요. 다만 지금까지 쌓아온 믿음과 사랑이 이어질 수 있을지 걱정도 커요. 반복되는 부분에 기시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더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원할 텐데 충족할 수 있을지, 또 배우로서 같은 캐릭터를 다시 표현하는 것이 고착화되어 보이진 않을지 고민하게 돼요. 이 숙제는 이제 하나씩 풀어가봐야죠.
이제훈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누구나 쉽게 호응할 수 있는 직관적인 작품과 깊이 파고들어야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 모두 발견할 수 있어요. 이는 일정한 영역에 머물지 않으려는 시도의 흔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내내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불친절한 이야기에서 ‘아,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하며 끝내 단초를 찾아내게 만드는 작품도, 직관적으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도 각자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관객 입장에서 생각해봤을 때 저도 어떤 날은 이런 걸 보고싶고, 어떤 날은 저런 걸 보고 싶거든요. 이런 성향이 필모그래피에 담기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고, 그런 작품을 끊임없이 마주하길 바라요. 매체도 상관없고요.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지만, 그게 연극이 될 수도 있고, 노래는 못하지만(웃음) 뮤지컬도 시도해보고 싶어요. 저에 대해 스스로 많은 발견을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제 모습을 누군가가 발견해 유용하게 써주기를 바랄 뿐이에요. 더 도전적인 시도를 하는 창작자를 만나고 싶고요.
17년 차 배우에게서 이제 막 시작하는 이의 열망과 열정이 보여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고요.(웃음) 굳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형태든 될 수 있도록 유연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그런 마음이 가능한 거예요? 어느 정도의 사랑이길래요.(웃음) 배우 일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 놀라고, 울고, 웃고, 그 안에서 느낀 모든 감정을 배우가 되어 제 방식대로 표현해보길 꿈꾼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제가 몇 편의 작품을 해왔는지도 상관없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영화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자면… 오늘 하루를 다 써도 부족해요.(웃음) 누가 들어주기만 한다면 며칠은 쉼 없이 얘기할 수 있는, 그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