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칼라리스 재킷과 니트, 팬츠 모두 제냐(Zegna), 블랙 로퍼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네크리스 크롬하츠(Chrome Hearts).

 

영화 <파수꾼>이 개봉한 지 벌써 12년이 흘렀어요. 그런데도 이제훈 배우의 얼굴에서 여전히 <파수꾼>의 ‘기태’가 보여요. 좀 전에 클로즈업 숏을 찍을 때도 ‘이건 기태의 얼굴이다’ 싶은 컷이 있었거든요. 그런가요?(웃음) 아마 <파수꾼>을 비롯해 <고지전>과 <건축학개론>이 관객에게 저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크게 각인된 작품이라 그렇지 않을까요. 특히 그 작품들을 좋아한 분들에겐 시간이 꽤 흘렀어도 그때의 제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는 거겠죠. 저도 ‘기태’(<파수꾼>), ‘일영’(<고지전>), ‘승민’(<건축학개론>)의 모습을 계속 가져가고 싶은, 조금은 더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하고요.

한편으론 계속 새로운 인물을 덧씌워야 하니까, 과거의 캐릭터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지는 않았나요? 빨리 나이 들고 싶다, 더 성숙하고 중후한 이미지를 통해 나이에 맞는 어떤 모습이나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싶다 하는 마음도 있었죠. 그런데 저는 배우 일을 평생 할 생각이거든요. 이런 생각으로 길게 보면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요. 시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고, 그 흐름에 따라 제게도 당도할 모습들이 있을 텐데 그걸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겠다 싶죠. 오히려 청춘의 면면이 남아 있는 이 시간을 충분히 즐겨야 할 것 같아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웃음)

사실 연기를 막 시작한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품고 있는 생각이나 시선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그때는 제가 맡은 인물을 잘 표현하는 데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어요. 그 인물의 상황과 관계,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만 생각하고 몰두했어요. 오롯이 연기를 잘해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한 상태였죠.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덜했어요. 대단한 성취도 실패도 경험한 적 없으니 무서울 게 없었던 거죠. 그에 반해 지금은 의식하는 부분이 훨씬 많아졌어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니 주변의 상황과 사람들을 살피면서 연기에 접근해야 하죠. ‘내가 잘해야 한다’에서 ‘우리 작품이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야가 넓어진 거죠. 누구나 처음이라 어려울 때면 몇 번 더 해보면 수월해지겠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연기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시야가 넓어지면서 여유로워진 건 사실이지만, 다른 형태의 무게를 짊어지게 된 것 같아요. 훨씬 무겁고 짊어지기도 어려운 무게예요.

앞으로는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갖게 될까요? 이 무게에서 초연해지는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까지 오는 데 10년 넘게 걸렸으니 또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겠죠.

 

블랙 셔츠 베르사체(Versace).

브라운 재킷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데님 셔츠와 데님 팬츠 모두 우영미(WOOYOUNGMI), 안에 입은 슬리브리스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부츠 페라가모(Ferragamo), 네크리스 크롬하츠(ChromeHearts).

 

내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영화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겠죠? 요즘도 영화관에 자주 가나요? 개봉하는 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성실한 시네필이라는 소문을 접했습니다. 여전히 시간만 나면 영화관에 가긴하는데, 예전보다는 빈도가 줄기는 했어요.

그래도 많이 보는 편 아닌가요? 그건 당연하죠.(웃음) 중학교 때부터 하루에 한 편은 반드시 본다는 나름대로 정한 룰을 지키며 살아왔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룰을 차치하더라도 저는 영화와 영화관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어두운 공간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쌓는 경험이 무척 소중해요.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서 OST도 찾아 듣고, 제작기도 읽으면서 여운을 느끼는 시간이 너무 좋아요. 저 혼자 GV에도 자주 가요. 제가 한 해석이 평론가나 감독과 일치할 때는 기뻐하고, 제가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를 접할 때는 놀라는 재미는 GV에 가야만 얻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영화 안에 머무는 게 더없이 즐거워요. 제가 연기를 하는 것과 별개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어요.

최근에는 어떤 영화들을 봤어요? <밀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비공식작전> <달짝지근해: 7510> 등 올여름에 개봉한 한국 영화는 거의 다 봤어요. 반은 궁금해서, 반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봤죠. 코로나19 이후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는데도 예전보다 좋은 영화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지 않아서 아쉽고 또 한편으론 고민되더라고요. 영화가 점점 사람들의 많은 즐길 거리 중 하나가 되어가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영화로 가져올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안겨줄 수 있을까,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지금 한 말에서 제작자의 마음이 엿보여요. 제작사 하드컷을 만들고 이끌어가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나요? 그럼요. 이전에는 나는 배우니까 연기만 잘해도 내 몫을 충분히 해낸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스태프, 제작진 등 함께하는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영화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 길을 고민해요. 이전에는 배우의 역할은 이 정도라며 선을 그어두고 그 안에서 충실하게 임했다면, 지금은 영화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경계를 두지 않고 무엇이든 하려 하죠. 좋은 영화라면 배우든 감독이든 또 다른 어떤 파트든 참여하고 싶어요.

보다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영화인이 된 셈이네요. 생각해보면 제가 지금까지 본 영화가 1천 편은 족히 넘을 거예요. 그런데 배우로서 내 작품은 얼마나 남길 수 있을까 따져보면 1백 편도 채우기 어렵죠. 그 점이 참 아쉽고 답답한데 어쨌든 제 몸은 하나잖아요. 그래서 제작사를 만든 것도 있어요. 하고 싶은 영화를 더 왕성하게, 많이 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