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맑고 투명하고 순수해서 자신의 비밀도, 작은 마음 하나도 숨기지 못하는 사람. 그 순수함으로 경계와 의심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사람. 드라마 <무빙>의 ‘봉석’과 이를 연기한 배우 이정하가 모두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이정하는 조금의 간극도 없이 봉석이 될 수 있었다. 봉석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지지하면서. 웹 드라마 <심쿵주의>를 시작으로 <런 온>, <알고있지만> 그리고 <무빙>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맑고 해사한 기운을 힘의 원천으로 삼아 달려온 그는 이제 더 넓은 세계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깨달음을 얻은 순간, 숨겨온 능력을 펼치는 봉석처럼 그에게도 각성의 순간이 당도했다.
웃는 얼굴에서 해맑은 봉석이 겹쳐 보여요. 그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자꾸 봉석이라 부르게 돼요. 저희 엄마도 봉석이라 불러요.(웃음)
새 이름을 얻음으로써 본명을 잃은 건가요?(웃음) 고마운 일이죠. 어떤 작품을 하든 맡은 캐릭터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게 최고의 칭찬 중 하나잖아요. <무빙>이 공개되고 나서는 어딜 가나 봉석이로 불리니까, ‘내가 진짜 봉석이가 됐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한번은 카페에서 주문하려고 줄을 섰는데 뒤에 계신 분들이 “<무빙> 봤어? 봉석이가….” 하기래 저도 모르게 뒤를 확 돌아봤어요. 그분들도 놀라고, 저도 놀라고.(웃음) 이런 경험을 하는 게 배우로서는 즐겁고 귀한 일이라 생각해요.
오늘 안 사실인데 심지어 왼쪽 볼에 점이 있는 것도 같아요. 이 정도면 봉석이가 될 운명이 아니었나 싶은데
요. 저한테 점이 있는 건 알고 있었는데, (봉석이랑)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건 저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됐어요. 살면서 점에 감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되게 신기해요.
여기까지는 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닮은 점이고요. 스스로 살폈을 때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점도 있나요?
캐스팅이 확정된 후에 감독님께서 해주신 말이 있어요. 그 캐릭터를 흉내 내기보다 너로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러니 너 자신을 더 믿어야 한다고요. 사실 제가 원작의 엄청난 팬이고, 봉석이라는 캐릭터를 너무나 사랑해서 더 어려운 점이 있었거든요. 잘 알고 있으니까 조금만 어긋나도 부족하고 달라 보일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의 그 말을 들으니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저만의 봉석이를 만들어가도 되겠다는 용기요. 그런 면에서 봉석이는 사실 저의 모습이라 해도 될 것 같아요.
<무빙>이라는 작품에는 매우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왜 봉석이라는 캐릭터에 빠진 건가요? 무해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순수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이 순수한 사람의 내면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고, 상처 입었을 때는 위로해주고 싶고, 깨닫고 나아가는 순간에는 응원하게 됐어요.
실제로 봉석이가 되면서는 어떤 점에 집중하려 했나요? 최대한 솔직해지려고 했어요. 봉석이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내보이는 사람이잖아요. ‘숨기지 말자, 아닌 척하지 말자.’ 내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임했어요.
맡은 캐릭터의 마음을 살피는 것만큼 이번 작품에선 외형을 갖추고,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도 주요한 과제였을 것 같아요. 몸무게를 30kg이나 늘리고, 와이어 액션을 연습하고, 하늘을 나는 움직임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현대무용도 배웠다고요. 살을 찌우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그 몸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계속 부딪히고 싸우고 하늘을 나는 통에 살이 자꾸 빠지는 거예요. 매일 촬영을 마치고 열심히 먹는 것도 과제 중 하나였어요.(웃음) 와이어 액션과 현대무용도 이번 작품을 하며 처음 익히게 되었는데,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무술 감독님이 와이어 힘들 거다, 아플 거다 하셔서 처음엔 겁을 좀 먹었는데, 타면 탈수록 꽤 재미있더라고요. 땅에 발붙이고 하는 움직임과는 완전히 다른 표현법을 배워나가는 게 이 작품의 즐거움 중 하나였어요. 기회가 되면 또 해보고 싶은데, 하늘을 나는 인물이 흔치 않아서(웃음) 아쉬워요.
그리고 매일같이 틈만 나면 원작자이자 각본가인 강풀 작가에게 질문을 했다고 들었어요. 어떤 답을 얻고 싶었던 거예요?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봉석이가 되고 싶은 욕심이 컸어요. 살을 찌우고 하늘을 날며 나름대로 생각한 봉석이의 모습을 그려가면서도 안주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봉석이를 만들어낸 작가님에게 꼬치꼬치 물었던 것 같아요. ‘봉석이 여기서 왜 이런 거예요? 봉석이는 어떤 마음이었어요?’ 이런 식의 문자메시지를 매일 보냈어요. ‘정하야, 너 봉석이야. 그냥 편하게 해’라고 답장이 오면 그날의 작은 용기를 얻는 거예요. 그냥 확인받고 싶었나 봐요.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시간을 꺼내 보인 날에는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무빙>을 처음 공개하던 날의 기분을 떠올려본다면요? 8월 9일 오후 4시에 공개했죠. 그날 3시부터 4시까지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기분을 오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요.
얘기해주세요.(웃음) 3시경에 헤어 숍에서 나와 차를 타고 <무빙> 팝업스토어로 출발했어요.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시간이었는데 이동하는 내내 무척 떨리더라고요. 매니저 형한테 떨린다는 말을 수십 번은 했을 거예요. 그리고 4시 도착해 홍보 활동을 하고 무대인사를 가기 위해 차에 타니까 5시가 좀 넘었어요. 차안에서 드디어 보기 시작하는데 진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들 열심히 온마음을 다했으니 그걸 온 세상이 다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몰라도 되니까 재미있게만 봐줬으면 좋겠다, 그러다 나만 재미있게 본 건 아닐까 이런 걱정과 부담감, 설렘이 번갈아 몰려왔어요.
모두가 시즌 2를 외칠 정도로 호평 받았으니, 그 부담감은 이제 덜지 않았을까 싶어요. 솔직히 잘될 거라는 예상은 어느 정도 하긴 했어요. 워낙 훌륭한 작품이니까요.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뭔가 싱숭생숭해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고요.
다음을 위한 동력으로 여겨보면 어떨까요. 유독 도전할 부분이 많았던 작품이고, 이만하면 훌륭히 해낸 셈이니까요. 맞아요. <무빙>을 통해 확실히 얻은 게
하나 있다면 자신감인 것 같아요. 이걸 해냈는데 못 할 게 뭐가 있나 싶은 거죠.
그럼 다음에는 어떤 것을 해내고 싶어요? 그간 방식은 다르지만 넓게 보면 해맑고 순수한 캐릭터를 많이 만났어요. 이제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닌가 싶어요. 다른 얼굴을 보여줄 기회가 오길 바라고 있어요.
어느 정도의 반전이 있길 바라나요? 처음으로 도전할 무언가가 있는 작품이라면 뭐든요. 기왕이면 봉석과 완전히 다른, 서늘하고 잔인한 인물도 되어보고 싶어요. 드라마 <런 온>에 임시완 선배님이랑 같이 출연했는데, 다음 해에 영화 <비상선언>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어요. <런 온>에서 다시 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선겸’을 연기한 선배님이 엄청나게 극악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게 진짜 배우구나’ 싶었어요. 언젠가는 저도 그런 반전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제 시작 단계이니 무엇을 기대해도, 누구든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어요. 계속해서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다른 인물로 분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지치고 힘들 때 위로받고 다시 나아가는 힘을 주는 사람들. 그리고 고민을 놓지 않는 저의 태도요. 딱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지금은 어떤 고민을 하는 중인가요? 살을 어떻게 빼지?(웃음) 봉석이에서 원래 저로 돌아오기까지 이제 5~6kg 남았거든요. 진짜 고민은 다시 새로운 인물을 만났을 때 시작하려고요. 그때까진 저로서 건강하게 잘 살면서 다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