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는 사랑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닐까 짐작한다. 온 마음을 다해 타인을 품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지닌 채, 배우 이연은 자신에게 온 인물에 대해 홀로 고민해왔다. 다정한 고독의 시간이 <절해고도>의 ‘지나’를, <길복순>의 ‘영지’를, 그가 표현해온 서로 다른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그가 쏟은 사랑이 관객에게 전해질 때, 우리는 각자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 하나의 군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연 절해고도 길복순 부산국제영화제 BIFF

셔링 톱과 그레이 데님 팬츠 모두 와이씨에이치(YCH), 로퍼 다프네랩(Daphne Lab), 실버 이어 커프 헤이(Hei), 진주 이어 커프 로아주(Roaju).

 

여러 영화 축제에 초청받은 <절해고도>가 9월 27일부터 극장에서 상영돼요. 개봉하기까지 적잖은 기간이 걸렸다고요. 기분이 묘해요. 영화는 촬영한 순서대로 개봉하지 않잖아요. <절해고도>가 3년 전에 촬영한 작품이라 기억이 조금 흐릿한 상태예요. 다시 보면 감회가 어떻게 새로울지 궁금해요. 제 민머리도 오랜만에 보겠네요. 하하!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 민머리에서 단발이 되었네요.(웃음) 많이 길었죠? 그사이 다른 작품들에 맞춰 자르기도 했으니 계속 길렀다면 지금보다 훨씬 길었을 거예요.

<절해고도>에서 이연 배우가 맡은 ‘지나’는 인테리어 작업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조각가 ‘윤철’(박종환)의 딸로, 아빠를 닮아 미술에 소질이 있지만 돌연 출가를 선언하죠. 한동안 지나로 지낸 경험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지나가 ‘도맹’이라는 법명으로 행자의 길을 기꺼이 걷겠다고 결심한 데는 도전하는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어떤 것을 놓아주는 동시에 무언가를 쟁취하는 힘을 얻으려면 도전이 필요할 텐데, 이를 지나가 했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도맹으로 지내며 ‘지나가 실존했다면 절에서 보낸 날들이 자양분 역할을 했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날들은 저한테도 스스로를 치유하는 좋은 시간이더군요. <절해고도>에 용기 있게 함께한 덕분에 <소년심판>의 촉법소년 ‘백성우’를 연기하는 등 배우로서 진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 같고요.

<절해고도>의 이야기가 본인에게도 중요한 기점이 되었군요. 개봉을 맞아 시집이 나왔다고 들었어요. 영화를 본 시인들의 시 그리고 김미영 감독과 배우들이 ‘나의 절해고도’에 쓴 편지가 담겨 있다고요. 새로운 작업이었어요. 글에 속마음을 꺼내놓으니 부끄러웠죠.(웃음)

편지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한 가지 부탁을 해요. 삶의 어떤 사건들을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의 비극적 과정처럼 여기지 않기를, 힘들었던 지난 일에 잠식되지 않기를 바란다고요. 세상을 탓하게 될 때 이 말을 스스로 되뇌어요. <절해고도>의 관객, 친구들과 팬들, 지금 제 앞에 있는 기자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결국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인 거죠.

이연 배우가 절해고도에 쓴 편지를 우리 모두가 받는 셈이네요.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섬’을 뜻하는 절해고도처럼, 모든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섬처럼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나부터 아껴줘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러려면 나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텐데, 이 시간에 익숙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아요. 하지만 외로움이 아닌 고독을 즐긴다면, 관계의 불순물을 걷어내며 진정성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스스로를 발효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세상 속에서 나를 잃지 않을 테고, 새롭게 발견한 내 낯선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연기 또한 고독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일 거라 짐작해요. 작품 속 인물에 대해 홀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니까요. 맞아요. 괴로워도 끈질기게 캐릭터를 대해야 그에게 마음으로 닿을 수 있죠. 하지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러니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면 배우로서 약속된 것들을 이행하며 인물에게 몰입하지만, 제 내면에서는 슬픔이 밀려오더라고요. ‘왜 이 인물은 이렇게밖에 못 할까?’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아픈 거죠.

그 슬픔을 넘어서게 하는 연기의 기쁨은 무엇이라고 느껴요? 작품 속 인물을 제 안에 두며 배우는 것이 있어요. 연기를 통해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거죠. 여러 작품을 거치며 미래의 제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고, 그래서 계속 현장에 가는 것 같아요.

중요한 배움을 남긴 캐릭터를 한 명 떠올려본다면요? 영화 <길복순>의 ‘영지’요. 영지의 솔직한 표현들에 감명을 받았어요. 그토록 솔직해도 된다는 걸 깨달은 이후 주변 사람들한테 마음을 좀 더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좋은 순간이 많이 생기고, 삶이 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해왔던 표현의 경계를 깨준 영지가 고마워요.

<길복순>의 영지 역을 맡으며 액션 연기를 선보였죠. 영지가 ‘길복순’(전도연)과 맞붙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에요. 전도연 배우와 호흡을 맞추며 들은 조언 중 무엇이 제일 깊이 각인되었어요? 배우 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보니 불안감이 앞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선배님이 “한창 걱정이 많을 시기고, 오히려 걱정하지 않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이 조언이 제게는 큰 응원이었죠.

 

헤링본 크롭트 재킷, 셔링 화이트 톱, 데님 팬츠 모두 와이씨에이치(YCH), 실버 이어 커프 헤이(Hei), 진주 이어 커프 로아주(Roaju).

이연 절해고도 길복순 부산국제영화제 BIFF

스웨이드 베스트와 원피스 모두 쿠메(KUMÉ), 스웨이드 부츠 마뗑킴(MatinKim), 실버 이어 커프 헤이(Hei), 진주 이어 커프 로아주(Roaju).

이연 절해고도 길복순 부산국제영화제 BIFF

벨벳 블라우스 로우클래식(LowClassic), 데님 팬츠 보브(VOV), 네크리스 로아주(Roaju).

 

전도연 배우를 비롯한 선배들을 보며 본인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죠? 그럼요. 현장에서 선배님들을 무의식적으로 빤히 쳐다보곤 해요. 지나온 모든 순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얼굴을 하고 계시거든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때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승화해낸 그 얼굴들이 참 아름다워 보여요. ‘나도 나중에 저런 힘을 지닌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금처럼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다 보면 가능한 일일 거예요. 단편과 장편을 넘나들며 꾸준히 활동해온 덕분에 오오극장 등지에서 이연 배우전이 열리기도 했죠. 이는 영화 속 이연을 사랑하는 관객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배우전이 열리게 만들어준 관객들의 마음이 귀하게 여겨져요.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더라고요. 배우전뿐 아니라 GV(관객과의 대화)도 마찬가지고요.

지난해 마리끌레르 영화제의 <절해고도> GV 이후에도 관객과 소통하는 자리가 즉흥적으로 마련되었죠. 열기가 아주 뜨거웠어요.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관객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이런 만남을 통해 웃음을 많이 목격할 수 있어 좋아요. 그게 저한테 굉장한 에너지가 되어주고, 더 잘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해요.

당시 GV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이 말처럼 그동안 작품을 통해 다양한 변신을 해왔죠. 작품에 등장하는 제 모습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어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변신의 한계를 살피려 해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물음표에 계속 다가가는 거죠. 저도 작품 속 저를 기대하고 싶거든요. 그러려면 좋은 작품을 선택해 제가 맡은 역할에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할 거예요.

그토록 열정을 다하는 연기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 같나요? 연기를 시작한 계기가 보컬을 전공하던 당시 무대 강박을 극복하기 위해 받은 연기 치료였어요. 연기가 예전엔 ‘치료’였다면, 지금은 ‘성숙의 과정’이에요. 연기 덕분에 저 자신을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나는 작업을 하며 ‘이 넓은 지구에서 난 먼지 같은 존재구나’ 하고 항상 생각해요.

먼지처럼 작은 존재임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 거라 믿나요?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건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기억이잖아요. 저에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했다’라고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을 것 같아요. 연기하는 저로 인해 누군가 설렘과 기쁨, 행복을 느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아요. 사람을 제일 좋아해요. 전부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기 때무네 일부 사람들에게만 애정을 쏟지 못하고, 모두에게 마음이 가요. 저에게 돌을 던지는 이일지라도 애틋한 감정이 생기죠. 그래서 괜스레 상처받기도 하는데, 한편으론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웃음) 인류애가 있는 편이에요.

사람 다음으로는 무엇을 제일 사랑해요? 자연이요. 왜냐하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요. 그 안에 있으면 편안해져요. 특히 바다에 배영 자세로 떠 있을 때, 하늘을 바라보고 바닷속 소리를 들으며 자유로움을 느끼죠. 제 본연의 모습은 주로 자연과 함께할 때 나타나는 것 같아요. 자연을 찾아가는 게 촬영이 끝난 후 작품을 털어내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올여름을 멋지게 보냈어요.(웃음)

차기작도 기대할게요. 앞으로 배우로서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싶어요? 고(故)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에 담겨 있는 문장이 떠올라요. ‘좋은 이야기는 상상력을 길러주고, 옳은 것을 알아보게 하고, 사람과 사물에 대한 사랑의 능력을키워주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완전히 공감해요.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 네 가지 조건 중 단 하나만 해당할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