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전에 영상 콘텐츠에서 소개한 좋아하는 열가지 아이템 중 카메라가 있는 걸 보고 영화 <판소리 복서>가 생각났어요. 작품 속 본인이 연기한 ‘민지’도 카메라를 좋아했잖아요.
그 영화 보셨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예요.
그 영화의 어떤 점을 제일 좋아해요?
메시지가 좋아요. 잊혀지는 것들, 소외된 것들을 한 번 더 끄집어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되게 예쁜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저는 진짜가 담겨 있어서 좋았어요. 민지와 ‘병구’(엄태구)가 주고받는 말이 대사가 아니라 진짜 대화처럼 느껴졌거든요.
맞아요. (엄)태구 선배님도, (김)희원 선배님도 진짜처럼 연기하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진짜처럼 보일지를 가장 많이 고민하며 찍었어요. 촬영하면서 되게 충격적인 순간이 있었는데요, 좋은 의미로요. 제가 어떤 대사를 했는데 소리가 작았는지, 태구 선배님이 잘 안 들린 거예요. 그럼 반응은 보통 두 가지잖아요. (들리지 않더라도 다음에 자신이 무슨 대사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 다음 대사를 하거나, 아니면 끊어가거나. 그런데 “네?” 하면서 다시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 대사를 한 번 더 했어요. 그 순간 진짜 병구와 민지로서 얘기를 한다는 게 느껴져서 너무 놀라우면서도 좋았어요. 영화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들어온 아이템이 카드예요. 요즘도 손 카드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새삼 놀랍더라고요.
요즘은 잘 안 쓰긴 하죠. 그런데 저는 여전히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해요. 나중에 쓸 카드도 보일 때마다 사서 모아두고, 받은 카드도 큰 상자에 담아두었다 종종 꺼내 읽어요.
최근에는 누구에게 카드를 보냈어요?
최근에 파리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8년 전쯤 엄마와 처음 갔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이후에도 몇 번이나 다녀온 도시인데 이번 여행에서 유난히 그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한테 썼어요. 그때 생각이 많이 난다고요.
너무 다정한데요.
쏘 스위트하죠.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는 거예요. 내심 부끄러워서 답장이 없나 싶었는데, “어디? 못 봤는데?” 이러더라고요. 서프라이즈라 생각하며 엄마 화장대 한쪽에 두고 나왔는데 몇 주가 지나도록 발견하지 못했대요. 콕 집어 알려주고 나서야 답장을 받았어요. 카톡으로요.(웃음) 역시 요즘은 카드를 쓰는 사람이 없나 봐요.
(웃음) 이제 본업 얘기를 해볼게요. 최근 의외의 콘텐츠에서 연기를 선보였어요. 태버의 신곡 ‘Being’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는데, 대부분 의외다 놀랍다 하는 반응이더라고요.
제가 태버 님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넉살 오빠나 한해 오빠한테 소문을 좀 냈는데, 그게 태버 님에게까지 전해졌나 봐요. 얼마 후에 새 앨범이 나오는데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어요. 대개 그런 제안을 받으면 음악을 들어보고 기획도 확인해보며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는데, 이번에는 고민도 없이 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태버 님 음악이면 좋겠지’ 하면서요.
얼마만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거예요? 의외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면 시간이 꽤 많이 흐르긴 했나 봐요.
헤아려보니까 한 5년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찍을 때도 그렇고, 완성본을 볼 때도 좀 낯설면서 동시에 옛날 생각도 나더라고요. 왠지 부끄럽기도 했고요.(웃음)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영화 <빅토리> 촬영은 마쳤나요?
끝내고 다음 작품을 고르는 공백의 시간이에요.
이런 시간은 어떻게 채우나요? 유튜브나 다른 정보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되게 부지런하게 일상을 가꾸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원래 부지런하게 이것저것 많이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일상을 벗어나 여행만 엄청 많이 다녔어요. 근래 2~3년간 쉴 틈 없이 계속 작품에 출연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엔 푹 쉬어보자, 아무것도 안 해보자 한 거죠. 그러기에는 여행을 너무 많이 다녀오긴 했지만요.
어디 어디 갔다 왔어요? 유튜브를 통해 삿포로에 다녀온 건 알아요.
영화 끝나자마자 파리에 갔다 와서 나트랑, LA와 뉴욕, 삿포로와 도쿄에 다녀왔어요. 다낭에도 갔었고요. 근 세 달간 국내에 있었던 시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돌아다녔어요.
거의 여행자의 삶인데요! 한동안 여행자가 되어본 느낌은 어땠어요?
올해 제가 스물 아홉인데요, 서른이지만 스물아홉인.(웃음) 그 때문인지 올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는데, 생각을 정리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어요. 원래 여행지에 가면 거기서 보고 느끼고 맛보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유난히 사색의 시간이 많았어요.
유독 사색을 많이 한 도시는 어디였어요?
뉴욕이요. 저는 늘 ‘현재를 산다’고 얘기해요. 과거에 대해 별로 후회하지 않고, 미래도 계획하지 않으며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돌이켜보니 사실 이 모든 것은 연결된 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의 선택이 결국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러니까 20대 초반에 한 선택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고, 또 제가 지금 하는 일들이 마흔의 저를 만든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좋은 말도 좀 해주면서 앞으로 10년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까지 잘해온 것 같으니, 앞으로 10년도 잘해보자고 다짐한 거죠.
그런 게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는 것만큼이나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일상에서는 매일을 살아내느라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잖아요. 너무 당연하지만 큰 사실을 깨달은 느낌이에요. 그렇다고 지금 슬럼프나 번아웃을 겪는 건 아니고요. 그저 앞으로 제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는 시간이랄까요.
최근의 선택인 영화 <빅토리>에 대해 묻고 싶어졌어요. 이제 막 촬영을 끝낸 작품이라 당장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진 않겠지만요. 이번 선택은 어떤 생각으로 이어질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영화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셨는데, 안 하면 이상할 정도로 시나리오가 참 좋았어요. 좋은 글은 읽으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데, <빅토리> 그랬어요. 그래서 선택한 건데, 현장은 더 좋았어요. 힘을 빼고 온전히 따라가면서 찍은 작품인 것 같아요. ‘촬영을 이렇게 재미있게 해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여지가 적은 현장이었어요. 촬영 전에는 ‘필선’이 해내야 하는 요소가 많아서 걱정도 있었는데, 막상 현장에 가니까 부담감을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선배님들이 연기에 대해 머리 싸매고 고민만 하지 말고 그저 그 안에서 편하게 있어 보라고, 그래야 현장이 즐겁다고 얘기해주신 적이 있는데, <빅토리>를 촬영하면서 그게 이런 느낌인가 싶었어요.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빅토리>가 열두 번째 작품이더라고요. 첫 작품인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이 나온 지 9년이 됐으니, 1년에 한 작품 이상은 꾸준하게 한 셈이에요.
어쨌든 저에게 계속 작품이 주어진다는 것 자체가 무척 감사한 일이에요. 그렇게 주어진 것 안에서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하려고 애썼고, 그래서 하나씩 완수해내며 보람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해냈다!’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스스로 해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길 기다리나요?
한 번은 만나고 싶긴 해요. 그런데 그런 순간이 올까요? 과연? 대단한 성취를 해낸 선배님들도 물어보면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시잖아요. 연기는 늘 애써서 100%의 노력을 기울여야 작은 발견 하나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때론 작은 상찬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늘 부족하게만 느껴지면 이 일을 사랑하기가 어렵잖아요. 물론 ‘이 신 나쁘지 않은데?’ 이런 건 있겠죠. 그런 순간은 있어도, 작품 전체를 봤을 때는 ‘하…’ 이러면서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마음과 별개로 저는 저 자신도, 제가 참여한 작품도 되게 좋아하고 예뻐해요. 그저께 신원호 감독님을 만났는데. 감독님이 “얘 맨날 그러잖아. 뭐 하고 있나 싶어 차 문 열어보면 지 사진 보고 있어”라는 거예요.(웃음) 그때는 “제가 그랬어요?” 하며 반발했는데, 생각해보면 전 제가 나오는 예능 프로가 제일 웃기고, 제가 나온 드라마가 제일 재미있고, 제가 찍힌 사진이 제일 예뻐요. 다만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정진하려는 마음은 조금 다른 거죠. 둘 다 필요하지 않을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이 잘 정돈된 사람의 말 같아요. 아직 과정에 있어요. 오히려 요즘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서 알아가는 중이에요. 내가 이런 걸 좋아하고, 저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럴 때 편안함을 느끼는구나. 이런 순간들을 잡아내는 중인데, 그게 되게 재미있어요.
최근에는 어떤 발견을 했어요?
제가 외향형이라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시간도 잘 분배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그게 제 본질적인 성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주 게으른 삶을 살 것 같아 스스로를 다그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알고 보니 제가 집순이에 게으른 사람이더라고요.
그 발견에는 유튜브의 영향도 있을까요? 4년 전 마리끌레르 인터뷰에서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를 발견해가는 재미가 있다’라는 말을 했거든요.
처음 접근할 때는 ‘내가 어떤지 나도 궁금해서 알아가고 싶어요’ 하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걸 해야 도파민을 일으켜 구독자들이 좋아하실까’ 하는 자세가 되었어요. 으하하. 나를 발견하기보다 진정한 유튜버의 길을 걷게 된 거죠. 구독자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 리뉴얼을 준비 중입니다. 진짜로요.(웃음)
게으른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정도면 부지런함이 본질적 성향 아닌가요?(웃음) 그게 제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데 주변 사람들은 “너 열심히 살고 있어”라고 할 때의 간극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아닌데, 아닌데 했는데 생각해보면 열심히 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앞으로는 저를 너무 다그치면서 가진 않으려 해요.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잘 살펴보려고요. 20대에는 그걸 잘 못했거든요. 30대에는 조금 더 저에게 집중하면서 일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답하는 모습에서 주저함이나 두려움이 없어 보여 좋네요. 사실 저는 언제든 두렵진 않아요. 10대든, 20대든, 30대든요. 그저 더 나은 길이 무얼지, 좀 더 내가 행복하게 발전할 수 있는 길이 무얼지 생각하지 두렵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