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나를 이해할수록 알게 되는 것.
배우 이설의 이해 안으로 들어온 사람과 사랑에 대해.
전에도 지금처럼 짧은 머리를 해본 적이 있나요?
성인 되고 나서는 처음이에요. 그 때문인지 잘랐을 때 조금 후회가 되긴 했어요. 거울을 보는데 제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괜찮을까? 나한테 어울리나? 계속 어색했는데 오늘 화보 덕분에 ‘잘 잘랐다’로 결론을 냈어요. 감사합니다.
배우가 헤어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꾸는 건 보통 작품의 영향이 크던데요. 새로운 인물을 연기하기 위한 거죠?
방영 중인 드라마 <남과여>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이미 단발로 잘랐던 터라, 자른 김에 새로운 스타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새 작품의 영향도 있고요. 지금은 얘기할 수 없는….(웃음)
<남과여>를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긴 한데요… 성옥(이설)이 말이에요. 일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데 왜 연애 앞에선 그렇게 답답해지는 걸까요?
맞아요. 저도 처음에는 진짜 이해가 안 갔어요. “어휴, 이렇게 괜찮은 애가 왜 저런 연애를 할까” 싶은 거죠. 내 친구였으면 진작에 정신 차리라고 했을 것 같잖아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하면서 주변의 오래 연애한 친구들에게 조언을 자주 구했어요. 듣다 보니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건 좀 극적이야” 하고 생각한 부분도 의외로 현실적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실재하는 연애 이야기를 수집한 후에 성옥을 다시 생각하니 그의 모습에서 제가 가진 면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누구나 연애하다 보면 좀 흐려질 때가 있잖아요. 특히 오래된 연인이라면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 안에 사랑도 있지만, 우정이나 인간적인 정도 있을 테고요. 이렇게 복합적인 감정이 쌓이면서 누군가에겐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원작을 봤나요? 꽤 많은 팬덤을 거느린 웹툰인데요.
저 그 작품의 엄청난 팬이에요. 원작 얘기를 듣자마자 “저 (시나리오) 안 읽고 할게요”라고 했을 정도로요.(웃음) 그래도 읽어는 보라고 하셔서 열심히 봤는데 역시 재미있었어요. 제가 무엇보다 매력적이라고 느낀 부분이 이야기의 순서예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썸의 기운이 있고, 그러다 위기를 맞닥뜨리기도 하고 결국 해피엔드를 맞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삐거덕거리다 이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시작하잖아요. 그 흐름이 더 현실에 발붙인 연애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로맨스물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오래된 관계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요소가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순간에 무너지는 현성(동해)과 성옥의 관계가 더욱 안타깝고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관계든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사실 대화만 잘했어도 그렇게 우르르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요. 그런데 오래된 관계일수록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나둘 넘기다 보면 뜬금없는 순간에 터져버리는 거죠. 성옥을 만난 후 앞으로 두렵더라도 깊은 대화를 시도 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가까운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인가요?
많이 하려고 해요. 마음에 잘 쌓아두지 않아요. 오해가 생기기 전에, 이 생각이 굳어지기 전에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도 간혹 용기가 나지 않는 때가 있었는데, <남과여>를 하면서 역시 대화가 중요하다는 답을 얻었어요. 대화 방식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제대로 깊은 대화를 해야겠다 싶을 때 쓰는 방식이 있나요?
일단 생각을 많이 해요. 그리고 노트에 정리해요.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지?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그리고 우리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지? 이런 걸 다 돌아본 다음에 정리해서 대화를 시도해요. 실수할까 봐요. 그렇게 준비하고 대화를 시작할 땐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담겨야 하고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다 같은 대화는 아니니까요. 마음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옥을 만나 얻은 것이 많은 것 같아요.
한동안 좀 어둡고 묵직한 작품을 해온 데 다 이런 유의 드라마는 처음이라 겁이 좀 났어요. 연애라는 게 되게 사적인 일이잖아요. 이걸 연기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제 개인적인 해석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오랜 연인이었다는 작품상의 설정과 반대로 현성 역을 맡은 동해 선배님과 처음 만나는 사이라, 현성과 성옥이 거쳐온 7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보여줘야 하는지도 걱정됐어요. 그런데 막상 도전해보니 얻은 게 훨씬 많아요. 제 주변의 관계를 돌아보게 됐고, 좋은 친구도 많이 생겼어요. 이별 과정도 나오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현장에서 사랑을 엄청 많이 받았고, 그래서 저도 기꺼이 사랑을 내어주게 되었어요. 작품 덕분에 제가 좀 밝아졌어요.
작품이 지닌 기운을 잘 흡수하는 편인가요?
그렇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잘 받은 것 같아요. 성옥이 친구들에게 사랑과 응원을 엄청 많이 받는데, 저에게도 같은 마음을 보내주니 어쩐지 자신감이 커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촬영은 작년에 마쳤는데, 지난해 가장 잘한 선택이지 않나 싶어요.
듬뿍 얻은 기운으로 이제 무엇을 해볼 생각이에요?
작년에 개인적인 시간을 가진 적이 없어서, 올 초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 해요. 혹등고래가 새끼를 낳으러 오는 시간이라 고래를 보러 오키나와에 갈지, 아니면 좀 더 멀리 여행을 떠날지 고민하고 있어요. 머무는 곳과 계절이 반대인 곳으로 가는 걸 좋아해서 어쨌든 따뜻한 곳을 찾는 중이에요.
여행 이외에 작품 사이에 빈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 채우나요?
그게 요즘 제가 찾고 싶은 것 중 하나예요. 그래서 일단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걸어요. 예전에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은 나가서 걸으며 사람들 구경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좀 오래된 맥줏집 같은 데 가면 그 동네에 터줏대감으로 보이는 분들이 있는데,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옆 테이블에서 맥주 혼자 마시면서 “저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참 재미있어요.
그 관찰이 연기할 때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아요.
그래서 유난히 재미있는 사람들을 보면 메모장에 써놓기도 해요. 신기한 게 드라마를 보면서 “무슨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진짜 하는 거예요.(웃음) 그런 순간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이해할 때 큰 도움을 줘요.
만약 누군가가 이설이라는 사람을 관찰하면 어떤 걸 발견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저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누구는 화난 줄 알고, 누구는 멍때린다고 하고, 또 누구는 다른 얘기를 하는 거예요. 똑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만났는데, 사람마다 저에 대한 인상이 다른 거죠.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굳이 뭘 하려고 하지 말자, 그냥 나로서 있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좀 자유로워졌어요.
그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많이 의식했던 걸까요?
엄청 의식했던 것 같아요. 특히 무표정할 때 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어딜 가든 늘 웃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했는데, 그걸 매 순간 의식하는 게 쉽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있어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러면서 더 솔직해진 것 같아요.
솔직하고 자유로워진 태도가 작품을 선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나요? 오롯이 나의 생각과 취향을 담은 선택이 가능해졌을 것 같은데요.
그게 선택으로 이어지긴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예전보다 영화나 드라마 시장이 확장되기 어려운 상황이라 선택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그럼에도 전보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나 보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다는 갈망은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얘기가 <남과여>라면, 요즘 보고 싶은 얘기는 어떤 거예요? 최근에 즐겁게 보는 작품이 있다면요?
드라마 <웰컴투 삼달리>를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거기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순박하고 귀엽고 자연스러워서 보기 좋더라고요. 혼자 실실 웃으면서 봐요. <남과여>처럼 <웰컴투 삼달리> 친구들도 맥주를 엄청 자주 마시잖아요. 보면 자꾸 맥주 마시고 싶어져요.(웃음)
<남과여>의 이야기가 절반가량 흘렀어요. 마지막까지 다 흐른 후에 성옥이 어떤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나요? 아직은 “정신 차려!”란 말을 주로 듣잖아요.(웃음)
“성옥아, 잘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결국은 모두가 성옥의 선택을 응원하고 지지해줄 거라 믿어요. 성옥의 마지막을 먼저 만난 저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거든요. “너무 잘했다!”
그럼 성옥으로 분한 이설 배우는요? 어떤 말을 듣고 싶나요?
저도 같은 말을 듣고 싶어요. “잘했어”. 이 말을 듣는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