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고 나가고 싶어요. 하지만 뚫은 나도, 끝내 뚫지 못한 나도 응원하려고요.” 배우 김지원이 온전히 나로 살아가는 일.

시스루 터틀넥 Grey Yang, 홀터넥 니트 톱 Prada.

방영을 앞둔 드라마 <눈물의 여왕>과 관련한 첫 인터뷰네요. 요즘 매일 촬영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지금까지 인터뷰에서는 ‘촬영 중입니다’ 하는 정도로만 말했거든요. 요즘 촬영 막바지라 거의 매일 촬영하고 있어요. 6개월간 찍든, 1년간 찍든 촬영 후반부는 늘 바쁜가 봐요.

<눈물의 여왕>에서 퀸즈 그룹의 재벌 3세이자 백화점의 여왕 ‘홍해인’ 역을 맡았습니다.
큰 사랑을 받은 전작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과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다가와요. 이런 댓글을 본 적이 있어요. “벤츠에서 차 두드리면서 우는 김지원 보고 싶다, 펜트하우스에서 에르메스 집어 던지면서 괴로워하는 김지원 보고 싶다.”(웃음)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잘 못했는데, 지금까지 제가 맡은 역할들이 직업이 없거나 가정환경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잖아요. 늘 ‘굳세어라’ 느낌의 캐릭터를 많이 보여드려서 그 반대쪽 극단에 있는 캐릭터를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이 작품을 선택하며 좀 더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겠다 싶었고요.

<눈물의 여왕>은 <별에서 온 그대> <사랑의 불시착>을 쓴 박지은 작가와 <사랑의 불시착>의 장영우 감독, <빈센조> <작은 아씨들>의 김희원 감독 이라는 조합만으로도 상반기 최고 화제작으로 꼽히고 있죠. 좋은 스태프들과 이루는 시너지도 체감하나요?
감독님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번 작품은 유독 등장인물이 많고, 연령도 다양해요. 많은 이들과 함께 호흡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날 일이 많지 않았거든요. 보통 둘 혹은 네다섯이었는데, 이 작품은 열 명, 열 두 명씩 함께하니 든든해요. 그 가운데 배우는 것도 많고요.

어떤 배움이 가장 커요?
함께하는 선배님들에게 배우는 게 많아요. 연습을 엄청 많이 하시고, 대본 맞춰보자고 먼저 말씀해주세요. 촬영을 마치고도 “이렇게 했으면 더 재미있었을까?” 하고 고민하는 선배님도 있어요. 무엇보다 작품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을 곁에서 많이 지켜봤어요. “그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지 않니?” “이 뒤에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하지 않니? 나는 이렇게 될 것 같아.” 이런 대화를 나누세요.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 지금 제가 열 번 연습할 거 선생님들은 한 다섯 번만 하고 안 하셔도 될 것 같거든요. 워낙 잘하시는 분들이니까 현장에 와서 연기 발사하고 딱 퇴근하실 것 같았는데.(웃음) 오히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장을 더 행복하게 느끼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진짜 멋있어요. 그 솔직함과 용감함.

일을 오래 할수록 일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냥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도 분명해지고요. 이는 여유에서 비롯되는 마음일 텐데요. 김지원 배우 역시 10년 넘게 연기하면서 현장이 점점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초반에는 내 몫만 해내기에 급급하잖아요.
맞아요. 예전에는 실수하면 밤에 잠 못 자고 전전긍긍했는데, 조금은 의연해지는 때가 된 것 같아요. 실수를 잘 무마하고 다음 날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요. 여전히 부족하고, 100% 만족이라는 건 나중에도 없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좋다, 즐겁다, 오늘 최선을 다했다 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해요.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니까요. 잘했으면 잘한 대로 기쁘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흐린 눈으로 지나가기도 하고요. ‘어젯밤 일은 꿈이었다. 내일부터 잘한다’ 하고.

맞아요. 조금씩 털어내는 힘이 생기죠. 끌어안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걸 깨닫게 되고요.
그러다 털어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차차 선배님들이 가는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거죠.

작품 외에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까요? 작품 안에서 의연한 인물로 살아서 그런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의연하고 용기 있는 캐릭터가 많았으니까… 저는 제가 연기한 캐릭터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요.

시스루 터틀넥 Grey Yang, 홀터넥 니트 톱 Prada.
니트 BOTTEGA VENETA 레이스 원피스 FABIANA FILIPPI

지난 인터뷰에서 “캐릭터와 자신의 모습을 비교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 사람은 이만큼의 용기를 가진 사람이네” 하며 본인을 반추한다고요. <눈물의 여왕>의 홍해인을 통해 본 김지원이라는 사람은 어떤 이던가요?
제법… 차갑지 않은 사람일지도? 조금 따뜻한 축일지도?(웃음) 제 스스로 살갑거나 다정한 편은 못 된다고 느끼거든요. 한데 홍해인 역할을 하면서 ‘아니다, 나는 제법 다정한 사람이다’ 하고 느껴요.(웃음) 홍해인은 굉장히 솔직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 숨기는 감정이 많아요. 자신의 위치와 짊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진짜 감정을 감추고 희화화하면서 살아가거든요. 무엇보다 유머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 모습이 멋있다고 느껴요. 본인이 어떤 말을 뱉음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거나 때로는 본인이 악역을 자처해서 상황을 해결해요. 한데 이 과정에서 위트를 놓치지 않는 거죠. 상황을 주도하는 데 능수능란한 리더예요. 저처럼 머쓱타드를 만들거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고.(웃음) 늘 부럽거든요. 분위기를 편하게 주도하는 분들이 있으면 저는 늘 가장자리에서 수줍어하는 사람이라.

김지원 배우가 지금껏 연기한 캐릭터들은 자아가 강한 인물로 다가와요.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 역시 고요한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이쯤되니 인물의 주체성이 김지원이라는 배우를 거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요.
감독님과 작가님들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캐릭터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하는 순간부터 그분들의 계획은 시작된 거더라고요. 애초에 캐릭터와 저의 합을 고려해 대본을 주시고요. 다행히 그 과정이 잘 맞은 것 같아요. 그런 인물에 애정이 더 가는 것도 사실이고요. 흔들리고 휩쓸리면서 성장 해가는 캐릭터도 매력 있지만, 그 안에서 자기 신념을 지키고 주체성을 가지고 뚫고 나가는 인물에 매력을 더 많이 느껴요. 배울 점도 보고요. 그게 결국 특정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져요.

본인 삶에서는 어떤가요? 뚫고 나아가고 있나요?

뚫고 나가고 싶어요. 하지만 뚫은 나도, 끝내 뚫지 못한 나도 응원하려고요.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잠은 죽음과 같아서 결국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삶이라고. 저 역시 계속 리셋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2월 1일의 김지원은 졌군. 하지만 2월 2일에 김지원은 어떨까?’ 하며.(웃음)

짧은 시간에 자주 부활하는.(웃음)
맞아요. 매일매일 리셋하고, 리트라이하고.(웃음)

누군가를 주체적이라고 표현할 때 그 사람에게는 최소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아요? 그간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들에게는 최소한 무엇이 있던가요?
음… 유머와 유연성이요. 지금까지 연기한 역할을 돌이켜보면 인물이 주체성을 지켜가는 과정에서 많이 넘어지고 돌아가거든요. 저마다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보다 실패한 확률이 더 큰 상황에서요. 근데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방향을 확 틀 수 있는 유연성, 또 어떤 일은 웃어넘기기도 하는 여유와 유머를 가진 캐릭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유라헬’(<상속자들>) 역시 유머를 아는 친구라고 생각하거든요. 말 한 마디도 그냥 하는 법이 없는. 제 주변에도 유난히 견고하다는 인상을 주는 분들을 보면 엄청 유연하고 재미있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틀리면 뭐 어때’ 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닌 분들이요.

인생의 청년기를 배우로 살았어요. 배우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자신에게 무엇을 준 것 같아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나눠본 건 아니니 다 알 수는 없지만, 배우라는 일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 못하는 감정, 극으로 치닫는 감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게 하잖아요. 이 과정에서 감정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 같기는 해요. 그것이 제 삶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어주고요. 배우가 아닌 삶을 선택한 30대의 김지원이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감정들이요. 가령 우리 부족이 끌려 갔다거나(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웃음). 감정의 농도가 짙어지는 건 저로서는 굉장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요.

정리할까요. 배우로 살아오며 작품으로, 역할로 무수히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붙잡고 싶은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음…. 단기간에 부활하는 힘?(웃음) 근데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들어요. 매 순간 부활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부활하지 않아도 되는 때도 있지 않을까? 부활하려는 강박을 갖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에는 일희일비의 왕이었는데 그래도 요즘은 나를 잘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의 태도가 잘 유지되었으면 해요. 근데요, 일희일비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나이가 들면 그다지 화날 일도, 슬픈 일도 없다고들 하시잖아요.

그러니 ‘일희일비’도 할 수 있는 때에 충분히 해보라는 거겠죠? 그렇다면 일희일비하는 제 모습을 좀 붙잡고 있을까요? (일동 웃음)
항상 하는 거라 그게 나을 수도 있어요.(웃음)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은지, 일희일비하고 싶은지 아직 결정을 못 했어요.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 어떤 결정을 했는지 꼭 알려주세요.
진짜 열심히 고민해볼게요. 일생일대의 난제일 정도로 고민입니다.(일동 웃음)

시스루 터틀넥 Grey Yang, 홀터넥 니트 톱 스팽글 스커트 모두 Pr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