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유리는 나와 다른 면을 지닌 누군가를 이해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를 또렷이 응시한다. 그것이 나만 아는 변화일지라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드레스 Acne Studios.
프린트 드레스 Acne Studios, 스틸레토 힐 Alexander McQueen.

영화 <돌핀> 개봉을 열흘 정도 앞두고 있어요.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나요?

여느 때와 다름없어요. 촬영을 마치고 개봉까지 3년을 기다린 작품이라 마침내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생각은 들지만, 비교적 덤덤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중이에요.

<돌핀>은 삶의 변화를 두려워하던 30대 여성 ‘나영’이 우연히 볼링을 접하며 세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이야기죠.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나요?

저와 절친한 배우인 조달환 선배님이 이 영화를 보고 ‘시래깃국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심심한데 자꾸 생각난다고요. 저도 그런 마음으로 편안하게 대본을 읽어 내려갔는데, 그럼에도 계속해서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여백이 있었어요. 사실 좀 따갑게 느껴졌어요. 나영의 말과 행동을 들여다볼수록 숨기고 싶은 제 모습이 보였거든요. 그걸 마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어요.

자신의 마음속 깊숙한 면을 나영에게서 보았던 거네요.

맞아요. 하지만 그런 면이 처음부터 보인 건 아니에요. 살아온 배경이나 성격 면에서 공통점이 거의 없고, 무엇보다 표현 방식이 많이 달라서 처음에는 오히려 저와 정반대인 사람으로 느껴졌어요. 저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표현하는 편인 데 반해 나영은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참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영과 제 안에 내재된 성향은 비슷한데 그걸 꺼내 보이는 방식만 다른 거더라고요. 연기하면서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됐어요.

꺼내 보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요?

나영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서천 지역과 가족, 마을 사람들에게 애착이 커요. 저도 제가 가진 것에 애착이 강한 사람인데, 제게는 애착이 집착으로 깊어지기 전에 감정을 전환할 기회가 늘 있었어요. 소녀시대 유리로서 무대에 서거나 배우 권유리로서 작품을 만나 새로운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때그때 감정을 잘 해소한 거죠. 그런데 나영에게는 그럴 만한 통로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사랑하는 마음이 의도와 다른 양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투박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해요. 그런 나영에게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게 바로 볼링이고요.

오간자를 덧댄 테일러드 재킷과 스커트, 플립플롭 모두 Sportmax, 장미 모티프 Blumarine, 재킷 안에 입은 브라톱과 그레이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튜브톱 드레스 We11done, 글러브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드러내는 데 더 익숙한 사람인데 참는 연기를 하느라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 지점은 어떻게 풀어가고자 했나요?

무척 어려웠어요. 저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거든요. 저와 다른 나영의 면면을 연기로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그냥 나영의 모습 그대로 살아보는 게 가장 편히 접근하는 방법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실천한 게 촬영이 없는 날에도 촬영지에 머물면서 나영이 애착을 느끼는 공간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 거였어요. 자전거도 타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면서요.

그 시간을 거치니 나영이라는 인물을 더 잘 이해하게 되던가요?

네, 그런데 나영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어요. 사실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나영을 연기하는 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그건 당시의 제가 인물의 모든 생각을 다 이해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촬영 때마다 나영의 말과 행동을 납득해보려고 감독님과 대화를 아주 많이 나눴거든요. 그런데도 온전히 해소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 작중 엄마 역을 맡은 길해연 선배님이 해주신 조언이 있어요. ‘너라는 사람이 아예 나영이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빗대어 고민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는데, 그 말이 현장에서 연기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품고 끝까지 연기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나영을 만난 지 3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돌핀>은 어떤 영화인 것 같아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영화인지, 나영은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 대신 말로 설명해주기보다 제가 직접 느끼고, 찾고, 알아가야만 답을 조금씩 알려주는 작품인 것 같아요. 제 반대편에 있는 인물을 이해하고 끝까지 연기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이 영화를 잘 완주했다는 느낌도 들어요.

나와 극명하게 다른 면을 지닌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변화하거나 새롭게 깨달은 점도 있나요?

나영을 만나면서 이전보다 말을 더 아끼게 된 것 같아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리고 자기만 아는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나영은 말을 켜켜이 쌓아 한 마디를 겨우 하는 친구예요. 그러다 보니 어떤 변화를 겪더라도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나요. 가령 영화 말미에 고장난 도어록 하나를 바꾸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는 굉장히 사소한 것으로 비칠 수 있지만, 나영에게만큼은 이전까지 받아들이지 않던 것을 새롭게 인정하고 이해하게 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변화거든요. 나영을 만나면서 눈에 띄지 않더라도 제게는 분명하게 느껴지는 변화를 잘 알아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티셔츠, 데님 팬츠 모두 Courrèges, 허리에 걸쳐 입은 드레스 Ferragamo, 슈즈 Sergio Rossi.
머플러 디테일의 니트 톱 Jacquemus, 마이크로 쇼츠 Leha,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쩌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닐까 싶어요.

맞아요. 대단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제게 의미 있으면 된 거죠. 나영을 마음에 품고 살기 전과 후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든요. 고집스럽게 자기 것을 지키려 하는 과정에서 상처도 입고 성장도 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던 사람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큰 용기를 얻었어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돌핀’은 거터에 빠진 볼링공이 돌고래처럼 툭 튀어 올라 남은 볼링 핀을 쓰러뜨리는 것을 의미해요. 실질적으로 점수에 더해지지는 않지만 뜻밖에 찾아오는 행운인 셈이죠. 살면서 이렇게 ‘돌핀 같다’고 느낀 순간이 있나요?

뜻밖의 행운…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돌핀은 순간의 요행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떤 선택들이 있었기에 끝내 만나게 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영화 초반부에 나영이 자전거를 끌고 볼링장에 가려다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한 번에 볼링장에 간 게 아닌 거죠. 끝내 볼링장에 가기로 선택한 뒤에도 처음부터 볼링이 즐거웠던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돌핀을 만나기까지 나영 앞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었고, 계속 나아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행운의 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거죠. 돌이켜보면 제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작은 날갯짓이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키듯이 매 순간 차곡차곡 쌓아온 선택들 덕에 제가 닿고 싶은 꿈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사실 다 돌핀 같은 순간이 아닐까 싶고요.(웃음)

뜻밖의 행운도 결국 자신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는 거네요. 듣다 보니 행운을 만나기 위해 때때로 노력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력이란 단어도 좀 거창해요. 그보다는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한 걸음씩 쉬지 않고 걸어가는 것만이 나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제자리에 있어도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고 느껴요.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또한 대단한 노력이란 생각이 들고요. 이 또한 <돌핀>이 가져다준 생각의 변화이기도 해요.

핑크 새틴 드레스 Claudie Pierlot, 비즈 장식 데님 팬츠 Self-portrait, 스니커즈 Golden Goose, 드롭 이어링 Ports 1961, 레드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컷아웃 플라워 톱과 데님 팬츠 모두 Valentino.

<돌핀>을 만나고 작품을 보는 관점 면에서 달라진 점도 있나요?

제게 잘 맞는 장르나 서사를 빨리 간파하는 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어요. 그걸 찾지 못했다고 생각할 땐 스스로가 답답하게 느껴졌고요. 그런데 이제는 그걸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열린 마음으로 어떤 역할이든, 어떤 장르든 다 경험해보면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제가 제일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문득 권유리라는 배우가 연기라는 일을 계속 해나가는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간단해요. 현장이 너무 좋고, 배우 권유리를 찾아주는 제작자들과 저를 궁금해해 주는 팬들이 있기 때문에 계속 연기할 수 있는 거죠. 이게 전부예요. 제게 연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가끔 생각하는데, 결국 저라는 사람을 응원해주는 팬들의 사랑 덕분에 제 얼굴을 떠올려주는 관계자들이 생겨나고, 즐겁게 연기해 완성도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보이면 또 새로운 응원과 사랑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계속 선순환하는 거죠. 이걸 인식하고 나니 연기하며 힘이 빠질 때도 “뭐야, 너무 재밌잖아?” 하면서 더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게 돼요.

주어지는 사랑과 관심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 그것 또한 달란트가 아닐까 싶은데요.(웃음)

그렇다면 ‘땡큐 갓!’이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