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다가도 이내 서늘해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배우 김민하의 명암.
4월 26일부터 열리는 ‘마리끌레르 영화제(Marie Claire Film Festival, MCFF)로 만나게 됐어요. 관객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를 받고 놀랐습니다. 시대와 장르, 스케일 등 면면이 다른 작품들로 채워져 있어 애호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고 느꼈어요.
저 엄청 고심해서 골랐어요.(웃음)
최종 상영작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결정됐죠. 이 영화의 어떤 점을 좋아해요?
2000년대 초반, 여름이 배경이잖아요. 설경구, 전도연 선배님이 지금의 제 나이일 때고요. 극 중 나이도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죠. 결국 서로에게 닿는 연이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사랑이 있는 거잖아요. 비단 연애가 아니더라도 때로 ‘나는 왜 이렇게 안 되지?’ 하고 낙담할 때 예상치 못한 곳에,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커다란 복주머니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제게도 위로가 되고요. 이를 요란스럽지 않게 잔잔히, 사랑스럽게 그린 작품이에요.
이제는 연기로 일가를 이뤘다 할 설경구, 전도연 배우의 여물지 않은 풋풋한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있죠. 설경구 배우가 욕조 안에 들어가 이불 덮고 있는 장면은 너무나 사랑스럽잖아요.
맞아요. 너무 귀여워요. 안경 낀 전도연 선배님도요. CCTV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하는 방백 장면이 참 아름다워요. 좋아하면 보인다고. 어떻게 이렇게 대사를 잘 썼을까 하는 장면도 많아요.
앨런 크로슬랜드(Alan Crosland) 감독의 <재즈 싱어>는 가장 의외였어요. 무려 1927년 영화예요.
최초의 유성영 화잖아요.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사람들을 상상하면 더 재미있게 다가와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어요. 스크린 안에서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한 거잖아요! 무엇보다 연출이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너는 아직 아무것도 들은 게 아니야(You ain’t heard nothing yet)”라는 대사는 단지 음성, 음향에 국한된 게 아니라 그 너머 세상이, 세계관이 넓어지는 말 같아요.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블랙 스완>도 거론했죠. 무언가를 깊이 좋아하고 경험이 쌓이면 애호의 기준이 까다로워지기 쉽잖아요. 한데 김민하 배우는 장르와 시대, 국경을 막론해 영화를 흡수해온 사람 같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요. 작품의 규모를 떠나 나에게 와닿는 이야기가 있거나,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맞닥뜨렸을 때 크게 동요하는 편이에요.
김민하 배우가 끝내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예요?
일기장 내용 같은 책과 영화, 드라마를 좋아해요. 누군가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나의 비밀을 표현하는 이야기요. 저도 일기를 쓰는데, 누군가에게 말로 풀어 놓지 못해서 적어내는 거거든요. <블랙 스완>도 그렇잖아요. 언젠가 그의 영화에 꼭 참여하고 싶을 만큼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블랙 스완> 속 ‘니나’를 보며 내가 겹쳐지기도 했어요. 완벽주의자이고,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큰데 거기에 부합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파괴할 때가 있었거든요. <블랙 스완>은 그런 마음을 이야기하는 영화고요. ‘나는 사실 이런 사람인데, 남들은 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있는데’ 하고 이야기를 건네는 영화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화라는 매체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한 작품도 있나요?
그런 영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이에요. 초등학교 때 이 영화를 처음 봤어요. 오드리 헵번을 알게 된, 제 생애 첫 클래식 영화예요. 영화 속 당시 뉴욕의 모습이나 패션, 음악 등 무언가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 시작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제겐 음악이 중요했거든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삶을 살다가도 음악이 울려퍼지는 순간 꿈을 꾸는 것 같잖아요. 일상이 메마르고 퍽퍽하다고 느낄 때도 음악이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영화처럼 만들어주니까 ‘나는 지금 영화 속에 있는 거야’ 생각해보는 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었어요. 그걸 처음 느끼고, 알게 한 영화가 바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에요.
그래서 오늘 화보 현장에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한 장면을 띄웠는데, 아름다운 장면이 많아 이미지를 고르기가 어려웠어요.
이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뉴욕에 갔을 때 영화의 시작 장면처럼 새벽 시간대에 거리를 걸어 본 적이 있어요. 근데 너무 위험하더라고요. 옛날 그 거리가 아니었어요.(웃음)
오늘 화보 촬영을 준비하면서 새삼 용감한 배우라고 느꼈어요. 그간 화보로 만난 김민하 배우는 통념적 아름다움을 따르기보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망설임이 없어 보여요. 그런 시도와 용기가 결국 작품 선택으로 이어질 것 같고요.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전형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나를 맞추는 게 힘들었어요. 성형수술을 해보면 어떠냐를 시작으로 체중을 45kg까지 감량해라, 옷을 이렇게 입어라 하는 것들이요. 이런 요구들이 연기보다 저를 더 힘들게 했어요. ‘내가 지닌 아름다움이, 나의 색이 있는데 왜 그래야 하지?’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때로는 ‘그냥 내 걸 다 포기해야 하나?’ 싶었고요. 물론 지금도 고민해요, 엄청 많이. 한데 오늘처럼 화보 촬영을 할 때는 재미있는 걸 시도해볼 수 있잖아요.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하는 걸 해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저는 지금 제 몸도, 얼굴도 충분히 예쁘거든요.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보다 스스로 발현할 수 있는 걸 더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나아가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저마다 각자의 고유함을 지켜가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더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작품을 고를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무엇일까, 내 목소리의 볼륨은 어느 정도일까 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온전히 나의 모습으로 서 있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잖아요. 타고난 게 아니라면 지금의 단단함이 만들어지기까지 시행착오도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만들어진 거예요. 저는 원래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봤고, 자아가 강하지 않았어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취향은 있지만 정작 내 중심은 없었죠. 소심한 성격이어서 어릴 때 누군가가 ‘너 이거 왜 이렇게 해!’ 하면 ‘맞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건데, 100% 내 잘못이야’ 하는 식이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러면 안 돼’라는 생각을 오래 하다 보니 가장 아껴줘야 하는 나를, 내가 가장 갉아먹고 상처를 주고 있더라고요. 그런 태도가 나를 파괴하고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나를 아끼고, 보살피고,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 조금씩 만들어졌어요.
그 시점이 언제예요?
드라마 <파친코>에 출연할 때쯤이에요. 제가 연기한 ‘선자’가 저에게 엄청 큰 걸 많이 가르쳐줬어요. 약하게나마 내가 스스로 내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다짐하던 시기였고요.
코고나다, 저스틴 전 감독이 <파친코> 촬영 당시 “이 장면에 존재하라고, 숨을 쉬라고”라는 디렉션을 했다죠. 선자를 통해 배운 것도 있지만 촬영 현장이 김민하 배우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줬을 것 같아요. 배우가 온전히 자신만의 숨을 쉬며 그 순간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만의 생각일 순 있지만, 모니터를 잘 안 봐요. 모니터링을 거의 안 해요.
오늘 촬영장에서도 안 하더라고요. 멋진 컷이 많아서 조금 보고 갔으면 했는데.(웃음)
맞아요. (웃음) 모니터링을 하면 어느 순간 내 모습을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현장에서 연기를 하는 건 저지만 (대사를) 내뱉고, (캐릭터가) 발현되는 순간부터는 그에 대한 판단은 제가 아닌 감독, 스태프,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저는 내뱉는 행위에 더더욱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거죠. 한데 이 과정에서 내 얼굴이 화면에 어떻게 나오고, 목소리는 이런 것 같고 하며 의식하게 되는 순간 적어도 그 장면에서는 존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불현듯 내가 생각지 못한 나의 모습이 나왔는데, 이를 신경 쓰면 결국 뻔하고 비슷한 것만 하게 될 테고요. 내가 어떻게 비치고 보이는가보다 그저 그 사건과 상황에 몰입해야 가능한 일 같아요. 당장의 내 눈앞의 배우, 세트만이 내 시야에 들어오도록 집중하려고 해요.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갖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에 대한 이야기도 했죠. 한데 이야기를 건네는 방법과 수단은 다양하잖아요. 그 방법이 연기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말이라는 것이 중요한 동시에 위험한 소통 방식이잖아요. 그래서 말을 아끼게 되고, 말보다는 글을 좋아해요. 근데 연기라는 퍼포먼스는 작가가 쓴 글을 내가 여러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일이잖아요. 이 과정이 재미있어요. 대사를 뱉으면서도 말이라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걸 수시로 체감해요. 얼마나 여파가 큰지 가늠해보기도 하면서요. 특히 영화라는 매체는 기록되잖아요. 이렇게 중요한 말들이 기록되는 순간 속에 있는 거니까 그 자체로 무척 소중하죠. 영화란 결국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그게 진짜 소중한 것 같아요. 각자의 다른 이야기를 한마음으로 한다는 것이요. 그 힘이 대단한 것 같아요.
큰 맥락 안에서 결국 어떤 이야기를 건네는 배우이고 싶은가요?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하나요?
원하는 방향은 있어요. 제가 무슨 일이든 당장 눈앞의 것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저 좋아 보여서, 멋있어 보여서 따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나중에 후회하든 안 하든. 선택의 우선 순위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인가?’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까?’예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거잖아요. 무슨 역할을 하건 내가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상처 입히게 되는 순간 엄청 뼈저리게 반성하고 후회하며 그러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엄청 노력하고, 또 노력할 거거든요. 제 안에는 배우로서 구체적인 큰 그림도, 목표도, 꿈도 없어요. 다만 아름다운 일을 해나가며 이 우선순위는 계속 지켜가고 싶어요.
맞아요. ‘최소한 이건 하고 싶지 않다, 되고 싶지 않다’ 정도의 자기 중심만 있으면 되는 것일지도 몰라요. 거창한 무엇이 되고 싶다기보다.
맞아요! 맞아요. 그래서 당장 눈앞의 것만 보기보다 시야를 내가 행복한가, 결과적으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쪽으로 보내려 해요.
마무리할까요. <파친코> 공개 당시 여러 인터뷰에서 “변화가 많은 시점이지만 그럼에도 이때까지 살아온 나 자신, 내가 지켜온 신념을 잃고 싶지 않다. 더 단단해지고 나를 잘 지키고 싶다”라는 바람을 이야기했어요. 이 다짐은 잘 지켜진 것 같나요?
잘 지켜진 것 같아요. 그래서 뿌듯하고요. 나를 지키는 건 여전히 제1 순위예요. 한데 나를 지키겠다는 건 ‘변하지 않을 거야!’ 하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본래 나의 색을 잃지 않겠다는 의미에 가까워요. 나에게 상처 주지 않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고요. 사람은 변해야 하고, 무조건 내가 옳다고 단정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중심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요. ‘나의 보폭을,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나를 해하지 않고, 타인에게도 그렇게 하자.’ 이게 제 ‘나를 지키자’ 프로젝트였거든요.(웃음) 잘 지켜진 것 같아요. 앞으로는 이걸 보다 어른스럽게, 우아하게 해내고 싶어요. 그런 다짐을 품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