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세상과 많은 이들을 이해하는 것. 배우 최수인이 생각하는 어른의 세계.
영화 <최소한의 선의>를 봤어요. 보기 어려운 영화는 아닌데, 보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더군요. 난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교사 ‘희연’(장윤주)과 예기치 못한 임신을 하게 된 학생 ‘유미’(최수인)의 시점 중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더라고요.
그랬어요.(웃음)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이렇겠지’ 싶다가도, ‘유미의 마음은 이럴텐데’ 싶은 거예요. 계속 내적 충돌이 있었어요. 이 이야기를 누구의 시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는데, 결론은 두 사람에게 주어진 조각들에서 출발하기로 했어요. 교사와 학생,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임신 등 하나씩 넓혀가다 보니까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유미라는 아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도 동일했나요?
한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에요. 유미의 선택들이 답답하고 어리석어 보이다가도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유미가 처한 상황만 계속 봤어요. 임신했으니 몸도 마음도 힘들 테고, 그 와중에 학교는 포기하고 싶지 않고. 임신부로서, 학생으로서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만 집중했어요. 그래서 어른들에겐 말을 안 듣는 고집스러운 애로 보일지라도 유미는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임신이라는 상황을 표현하는 데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미세한 움직임 하나로도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잖아요. 엄마를 포함해 임신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아주 많이 했어요.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래서 습관적으로 하게 되는 움직임이 어떤지, 손은 주로 어디에 두는 편인지 등이요.
어떤 말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못 얻었어요.(웃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임신부는 이렇게 움직인다’ 하는 정답이 없더라고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엄마는 뒤허리를 줄곧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또 어떤 분은 그러면 오히려 아파서 아랫배를 받쳤다는 거예요. 눕는 자세도 다르고, 감지하는 몸의 변화도 달라요. 정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그 후론 어떤 움직임을 생각하기보다 ‘엄마가 된다는 건 무엇이고 어떤 마음이 들까’ 하는 생각만 했어요.
그 마음을 생각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
좀 이상했어요. 상상인데도 제 몸속에 생명이 있다고 계속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두근거리더라고요. 왠지 두렵기도 했고요. 이게 유미의 감정이겠구나 싶었어요. <최소한의 선의>라는 작품을 하면 서 얻은 게 많은데, 그중 가장 큰 게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 거예요. 임신, 그것도 10대의 임신이라는 게 학교 다닐 때 성교육 수업으로 접한 게 전부라 되게 멀게만 느껴졌거든요. 나 혹은 내 주변의 경험이 아니면 딴 세상 이야기다 하면서 바라보지 않게 되는데, 유미를 연기하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 이랬으면 나는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영화 <우리들> 개봉 당시 한 인터뷰에서 “어떤 캐릭터를 맡아도 그 감정에 푹 빠져서 연 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는 대답이네요.
기억나지는 않지만, 지금도 같은 마음이긴 해요.(웃음) 벌써 내년이면 <우리들>이 10주년이 되는데요. 그사이에 제가 유일하게 변한 것이 있다면 영화나 그 안의 인물을 더 넓게 보려고 한다는 점일 것 같아요. 영화가 개봉하던 때부터 매년 <우리들>을 다시 보 는데, 해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열두 살 때는 큰 스크린에 제 모습이 나오니까 마냥 부끄러웠던 것 같고,(웃음) 중학교 졸업할 때쯤엔 이야기가 보이고, 고등학교 때나 성인이 되어서는 또 다르게 보이는 게 있었어요. 영화가 관계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관계란 게 시기마다 달라지니까, 영화 안에 담긴 메시지가 그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지금도 <우리들>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 는 중인 것 같아요.
벌써 스물한 살이 되었다는 사실에 좀 놀랐는데, 언제 이렇게 멋진 어른이 된 건가요?(웃음)
아직 어른은 아니고, 되어가는 중인 것 같아요.(웃음)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배우로서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나요?
아무래도 학교라는 공동체를 벗어나 사회에 나오니까 더 많은 걸 접하고, 보고, 경험하잖아요. 삶을 살아가면서 접하는 모든 것이 연기에도 접목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학생 때는 어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왜 이런 선택을 하지? 어른들은 이런 건가?’ 하던 부분이 이제는 ‘그럴 수 있겠다’ 하며 받아들여지는 게 더 많더라고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 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2년 동안 카페에서 알바를 했어요.
그 경험에서 얻은 이해는 무엇인가요?
일단 알바생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요.(웃음) 그리고 양심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 한정된 공간에서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사소한 일이라도 혼날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핑계를 대거나 외면하는 건 현명한 대처가 될 수 없더라고요. 나의 실수에 양심껏 행동해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이에서도, 손님과 직원 사이에서도 서로에게 선의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작은 선의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 경험치가 연기할 때 귀중한 재료가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되길 바라요. 어떤 경험이든 버릴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다음이 계속 궁금해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제가 함께한 영화들이 어떻게 달리 보일지도 궁금하고요. <우리들>처럼 <최소한의 선의>도 시간이 한참 흘러서 보면 또 다른 부분이 느껴질 것 같거든요.
10년쯤 흐른 뒤, <최소한의 선의>를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들길 바라나요?
지금은 유미의 측면으로만 생각했다면 그때는 모든 아빠, 엄마, 희연 선생님의 시선에서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때쯤이면 더 어른이니까, 30대쯤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최수인 배우가 계속 이해를 갈망하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어요. 30대가 되어도 비좁은 세계 안에 머무는 사람도 있거든요.(웃음)
그런 거예요?(웃음) 제가 생각하는 어른은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