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여전히 일이 가장 분명한 행복이거든요.” 좋아해서 어렵고, 좋아해서 더 잘하고 싶은 배우 이호정의 일.




가운데 | 레터링 프린트 드레스 Moschino.
아래 | 스트라이프 셔츠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잘 지냈나요? 3년 만의 만남이라 안부를 먼저 묻고 싶어요.
저도 안부가 궁금했어요. 잘 지내셨어요?(웃음) 3년 전에도 여름이었는데, 이번에도 여름의 만남이네요. 저는 그때처럼 촬영도 열심히 하고, 틈틈이 여행도 다니면서 잘 지내고 있었어요.
지난 3년의 시간에서 가장 선명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촬영장에 머물던 날들은 다 또렷하게 생각나요. 저에게는 여전히 일이 가장 분명한 행복이거든요. 특히 최근에 촬영한 새 작품이 참 좋았어요. 근데 이건 스포일러라 얘기할 수 없으니(웃음) 지금까지 나온 작품 중에 떠올려보자면, 아무래도 <도적: 칼의 소리>의 ‘언년이’인 것 같아요. 진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캐릭터가 아닌가 싶거든요. 감정 신도, 액션 신도 뭐 하나 수월한 게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배운 게 아주 많아요. 언제 이런 걸 또 해보겠나 하면서 막 온 힘을 다 했어요, 아하핫.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 때부터 생각한 건데, 유난히 밖에서 고생 하는 역할을 자주 맡는 것 같아요. 바닥을 구르고, 몸을 부딪히고, 생사를 오가는.(웃음)
감독님들이 저를 그렇게 만들고 싶은가 봐요.(웃음) 그런데 저도 안락한 실내에 머무는 것보다 나가서 부딪히는 걸 더 재미있어 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하는 말이 있어요. 고생길 시작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요, 아하핫. 이번 드라마 <굿보이>도 장난 아니게 힘들었어요. 다들 엄청 고생했어요.
첫 등장부터 마약의 귀신, ‘마귀’라는 호칭까지 여러모로 범상치 않긴 해요.(웃음)
대본을 읽을 때부터 세다, 강렬하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특히 첫 등장 신은 글로 읽는데도 ‘보통 미친 사람이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어요. 감독님께서 마귀를 설명할 때 할리퀸을 언급했는데, 그 정도로 만화적이고 독특한 캐릭터예요.
언년이를 연기할 때와는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 같아요.
저로서는 굉장한 도전이었고, 유난히 어려웠어요. 지금이 아니면 못 해볼 것 같아서 일단 가보자 했는데, 어디까지 가야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표현을 자칫 잘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과하게 느낄 수 있고, 덜 하자니 이 캐릭터가 살지 않는 것 같고. 그 사이 어딘가 정도를 찾는 과정이 좀 필요했어요. 되게 흥미로운 인물을 만나서 반가운데, 한편으론 그런 거죠. 얘를 나만 알면 안 되는데, 나만 매력적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래 | 윈드브레이커 Self-Portrait.




더 갈까, 덜 할까. 그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쪽이었어요?
처음엔 덜 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거든요. 그럼 항상 감독님이 “더 더 더!” 외치는.(웃음) 그렇게 계속 더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넘어가게 되더라고요.
그 순간들이 도전의 성취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안 해본 게 좋아요. 내가 못하는 걸 해보고야 말겠다는 기세도 있고요. 그렇지만 하고 나선 ‘어떡하지, 괜찮을까…?’ 하는 거죠.(웃음) <굿보이>도 너 무 걱정돼요. 이야기에 잘 녹아들면 좋겠는데, 감독님이 잘 완성해주셨겠죠? 아흐흐, 보시는 분들이 마귀를 잘 이해하고 즐겨주면 좋겠는데… 이 걱정은 마지막 화까지 놓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앓을 정도로 걱정되면서도 매번 새로운 걸 보면 들끓는 거죠?
자격지심이 있나? 모르겠어요. 뭐라도 더 하고 싶고, 더 잘하고 싶고. 맨날 그래요.
그 도전 정신이 오늘 화보까지 이어졌죠. <클로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세 편의 영화 속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화보로 담아내는 기획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응했어요. 그 결과가 12시간 가까운 여정으로 이어지는 중이고요.(웃음)
그래서 오늘도 헤어 메이크업 실장님께 미리 쉽지 않은 하루일 거라 말하긴 했어요.(웃음) 그런데 꼭 해보고 싶었어요. 늘 새로운 인물을 갈구하는데, 화보로 3명이나 해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이중 루니 마라가 연기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천재 해커 ‘리스베트’는 직접 제안한 인물이에요.
기획에 대해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떠올랐어요. 리스베트, 너무 매력 있잖아요. 굉장히 냉소적인 것 같으면서도 마음을 여는 순간들이 있고,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지만 누구 보다 치열하게 존재하려는 모습에 속절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물이에요.
어떤 영화를 좋아해요?
고정된 취향은 없어요. 장르에 상관없이 한 장면, 대사 한마디라도 와닿는 게 있으면 그 작품을 엄청나게 사랑하게 돼요. 최애 영화 중 하나가 <바빌론>인데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가 파티장에서 케이크 들고 “그래 나 미친년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말이 너무 통쾌하더라고요. 영화관에서 아하핫하 하면서 웃었어요. 그래서 화보에 대해 얘기할 때 <바빌론>도 후보에 있었어요.
관객으로서도 배우로서도 뜨겁고 분명하고 치열하게 존재하는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이호정 배우가 나아가는 방향일 수도 있겠다 싶고요.
와… 그런 것 같아요. 그동안 지금 아니면 바로 다음의 것을 바라보느라 제가 향하는 방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진 못했는데, 지금 이 말을 듣고 나니 내가 그랬구나 싶어요. 맞아요. 흐릿하고 고요한 것보다는 확실하고 치열한 걸 재미있어 하고, 저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하는 편인 것 같아요.
역시 고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을.
그렇죠, 아하하.
치열함에서 잠시 멀어진 지금은 어떤 시간을 보내는 중인가요?
기다림엔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분명 좋은 작품이 또 올 거라는 믿음은 있지만, 어느 타이밍에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힘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 시간을 더 잘 활용하고 싶은데… 답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다른 배우들은 작품과 작품 사이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정말 궁금해요.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일이 어려운 건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길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쨌든 휴가라 생각하고 그냥 흘려보내고 싶진 않아서 나름대로 훈련 같은 걸 해보고 있긴 해요.
아까 대화의 시작점에서 일이 가장 분명한 행복이라 말했잖아요. 대화의 마무리가 그와 비슷한 이야기로 정리되네요. 지금 이호정이라는 배우의 모든 즐거움과 고난은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왜냐고 물어보면 “그냥 좋아하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