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여성성으로 가득 차 있는 김언희의 첫 번째 시집 <트렁크>(1995)에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일들에 대한 낱낱의 감정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스타킹을 벗으니/ 넓적다리가/ 머리를 빗으니/ 머리 가죽이/ 훌러덩/ 벗어져버린다/ 깔깔깔 웃다가/ 웃던 입이 영영 안 다물어지고/ 덜커덕/ 턱뼈 내려앉는 소리” (‘떨켜’中)

철저히 대상화된 여성의 필연적인 비극, 고깃덩어리나 실험대상으로 비유되는 더럽혀진 신체에 관한 혐오, 임신 중절의 아픔을 그리는 여러 시편들이 필터링 없는 솔직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고백들은 내밀하지 않다. 사포질 없는 생생한 언어는 오직 진짜를 말하는 데 쓰인다. 김언희는 ‘거친 말을 쓰는 식구들 사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진실한 표현을 쓴 것 뿐’ 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여성의 욕망 또한 곳곳에 등장한다.

“사람이 그리워/ 주둥이가 질질 끌리는 봄날….” (춘궁 中)

“마음만 섞어도/ 애가 서는구나/ 들통이구나/ 체외수정이란 게/ 이런 것인 줄/ 꿈에도 몰랐구나” (산월 中)

시 전반에 등장하는 욕망 어린 단어들은 여성에게도 욕구가 있다는 자연스러운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가부장적 남성성은 전복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 여성의 현실을 말하는 문학에서 쉬이 찾아볼 수 있는 방식이나, 이러한 경향은 2021년인 지금 문학의 바깥에서 이제 막 현실이 되었다. 김언희처럼 이르게 용감했던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외면 받는 현실을 지적했고 그 책을 읽고 자란 여성들은 현실을 똑바로 보며 균열을 일으킨다.

<트렁크> 속 시들은 아름답지 않다. 애초부터 김언희는 삶의 아름다움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삶이 정말 그렇게 자주 아름답기는 한가? 떳떳한 한 몫의 인간으로 생을 구축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더럽고 때로는 끔찍하기까지 한 일인지, 그 인간이 사회적 약자일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 김언희는 자신만의 언어로 강렬하게 노래한다.

26년이 지난 김언희의 트렁크에서 용감하고 솔직한 여자들이 쏟아진다. 먼저 걷고 있던 시인이 멀리서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