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영 시인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라며 생경한 말을 되뇌던 시인 유계영이 2년 뒤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이라고 당차게 외치며 새 시집을 들고 나타났다. ‘인생은 너무나 지루하기에 재미를 놓칠 수 없다’는 그는 시집 곳곳에 유머러스한 장면을 심어놓았다. 정크 푸드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꾸만 두꺼워지는 햄버거, 새치기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학생의 유려하고 우아한 몸짓, 대만 야시장 좌판에서 인테리어 소품으로 구입한 불상의 머리 등이 그것이다. 유계영의 이번 시집은 시가 재미없고 어렵다는 해묵은 오해를 또 한 번 깨뜨릴 준비가 됐다.

 

유계영 시인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이후 2년 만에 새로운 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을 펴내셨어요.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시인들이 시집 한 권을 묶는 데 평균 3~5년이 걸려요. 그에 비해 2년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죠. 하지만 결혼과 이사 등 일상에서 큰 변화를 겪어서 그런지 제겐 유구하게 느껴져요. 코로나19 탓에 계획한 결혼 일정에도 차질이 생기면서 심적으로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요. 시집을 낸 후로 요즘엔 거의 집에서 지내는데 일종의 회복기로 여기고 있어요.

시집의 제목은 입장이 정리된 상태에서 명쾌하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요. 저는 운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의 말에서 시집 제목을 떠올리곤 해요. 주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시인들은 제게 당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말씀해주세요. 이런 느낌을 반영한 제목으로 아침달 출판사 대표님이 시 ‘버거’ 중 한 문장을 골라주셨어요.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은 아버지의 말이 막 끝나고 딸인 화자가 말을 시작하는 대목에 쓰인 문장이죠. 좀 웃긴 얘기일 수 있지만, 저는 세대교체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어요. 문학도, 예술도 그 흐름 안에서 기성의 것을 뒤집으며 새로운 목소리가 나오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선배 시인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시를 자양분 삼아 많이 성장했고 ‘이젠 내가 말해보겠다’는 거예요. 이 문장을 시집의 제목으로 쓰기 위해서 ‘미래의 시에 나 역시 뒤집힐 것이다’라는 필연을 감지했고요. 새로운 목소리가 말해줄 미래의 시도 기대됩니다. 저는 제 시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뒤집히는, 그런 아름다움이었으면 좋겠어요.

점묘화 같은 푸른색 표지 이미지가 인상적이에요. 어떤 의도를 담았나요? 잔잔한 수면에 돌을 하나 던졌을 때 생기는 파문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침달 출판사 시집에 파문으로 시작한 표지 이미지가 꽤 많아서 어떻게 변주할 수 있을지, 디자이너가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안녕하세요 계영씨’라는 시에 눈동자 속에 점묘가 번진다는 표현이 있는데 디자이너가 이 구절을 모티프로 활용하신 것 같아요.

이전 시집에 관한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프랑스 시인 외젠 기유빅(Eugène Guillevic)의 문장을 언급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인께서 시를 쓰기 시작한 출발점과 맞닿은 얘기가 될 것 같은데, 그 문장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당시 그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만약 언젠가 / 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 / 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이런 내용인데요. 과학으로 규명된 것이 이토록 많은 세상에서 돌이 미소 짓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시가 이런 문장을 툭 던져주면 왠지 그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잖아요. 그게 문학의 힘이기도 하고요.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어쩌면 삶의 여러 국면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말하기 위해 문학, 특히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런 ‘신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외젠 기유빅의 문장은 제게 신비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다가왔어요. 저는 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어떻게 시 쓰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시는 논리적이고 유용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해방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시를 쓰는 일은 생활인으로서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이 신비를 믿는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여전히 신비가 좋기 때문에 저는 계속 시를 쓸 거예요.

이번 시집을 통해 신비를 믿는 사람을 만난 적 있나요? 어느 날 시집을 준비하는 동료 시인에게 문자메시지가 왔어요. 제 시집을 읽고 울고 있다는 거예요. 그 친구는 평소에 긴장을 많이 하고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어요. 시 속에 나타나는 그의 세계관 역시 촘촘하고 세밀하게 설계돼 있어요. 그런데 친구는 시를 쓸 때 워낙 힘드니까 장난치는 듯한 제 시가 자신의 속을 풀어준다고 하더라고요. 저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해준 얘기라서 더욱 듣기 좋은 피드백이었죠.

‘좋거나 싫은 것으로 가득한 생활’이라는 시를 맨 앞 장에 배치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가르치는 고등학생 중에 문제적 인물이 있어요. 언젠가 그 친구가 새치기하는 걸 목격했는데 몸동작이 워낙 유려해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죠.(웃음) 마치 어딘가에 스며들듯이 엘리베이터를 타더라고요. 그 우아한 몸짓이 뭔가를 위반할 목적이라는 점이 재미있었죠. 어쩌면 우리의 본모습, 소위 영혼도 활짝 열린 정문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실수로 열린 문틈, 창문, 틈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아닐까요? 이 시를 맨 앞에 배치한 이유도 독자들이 살짝 열린 문으로 부드럽게 새치기하듯, 자신의 몸짓대로 들어오길 바랐기 때문이에요.

 

 

유계영 시인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시 ‘파이프’에서 야시장 좌판의 석가 머리가 굴러가며 인테리어에 좋으니 나를 데려가라고 말하는 장면, ‘썩지 않는 빵’에서 집 안 풍경을 맛있게 필터로 찍는 장면 등 시 곳곳에서 유머러스한 이미지들이 눈에 띕니다. 시를 위해 일상에서 주로 어떤 장면을, 어떻게 포착하나요? 모든 것을 창작해야 한다면 이렇게까지 못 썼을 거예요. 저는 사실 누굴 약 올리고 얼굴 빨개지게 만드는 걸 좋아해서 그런 지점을 잘 발견해요. 위의 장면들은 다 겪은 일이에요. 대만에 여행 갔을 때 불두(佛頭)를 꼭 사고 싶었어요. 그 마음을 살펴보니 제가 그걸 인테리어 소품으로 어딘가에 놓고 싶어하더라고요. 사람의 쓰임이 사물의 본질을 넘어서는 역설적 상황이 전 무척 재미있어요. ‘버거’라는 시 역시 일상 속 이상한 장면에서 출발했어요. 사람들이 햄버거를 정크 푸드에서 탈피시키기 위해 빵 사이에 식재료를 자꾸 끼워 넣잖아요. 햄버거 먹다가 턱이 빠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높이가 어마어마하죠.

시 속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이유가 있나요? 예술은 궁극적으로 재미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삶 전반이 무척 지루하고 재미없잖아요. 죽으면 모든 게 소용없고요. 이런 염세적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하는데 제게는 그게 유머예요. 현실 사회는 비경제적이고 쓸모없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니, 그럴 때 예술이 필요한 거죠. 다시 말하면 현실 세계에서 잘 버티기 위해 재미있고 예술적인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시집에 실린 ‘시’라는 작품은 시인의 시론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데뷔 10년 차이니 나도 이제 시론을 써볼 때가 됐지’라며 각 잡고 쓴 건 아니에요.(웃음) 대학로의 시 페스티벌에서 자신의 시에 대한 선언문으로 써놓은 시였어요. 그때 쓴 시가 이번 시집에 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함께 묶었거든요. 시에 대한 시를 쓰게 된 이유는 시가 이젠 생활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시를 가르치고 시를 큐레이팅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 없죠. ‘시’는 제가 생각하는 시이자 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시예요.

누군가에게 시를 가르칠 때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얼마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서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물어봤어요. 일단 한숨을 많이 쉰대요. 그리고 ‘살짝 어긋날 것’이란 말을 되게 강조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의 사고방식이 제도권 교육과 사회생활 안에서 지극히 평준화되잖아요. 자신만의 개성이나 아름다움은 이런 규격화된 메커니즘에서 살짝 벗어날 때 생기는 것 같아요. 이성적인 글을 쓰더라도 어떤 도약 지점에서는 반드시 빗겨가야 한다고 자주 얘기하는 편이에요.

이번 시집을 쓰고 엮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장소, 동물, 물건을 한 가지씩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물건이면 제가 이전에 펴낸 시집이겠죠. 아무래도 달라진 것을 보여줘야 하니까 답습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을 쓴 것 같아요. 동물은 새요. 새를 좋아해서 조류를 관찰하는 유튜브 영상을 되게 많이 봐요. 높은 곳에서 보면 인간도 마치 점처럼 보일 텐데 그런 새의 시선이 좋더라고요. 장소는 새벽이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주로 새벽에 시를 써요. 고요한 그 시간이 제게 작업실이나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계획한 일들에 대해 예고해주신다면요? 올가을에 민음사에서 산문집이 나와요. 제가 원래 무겁고 진지한 편이라 겉으로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자주 해요. 하지만 뭔가를 쓰려고 하면 시적인 것만 말하는 심각한 자아가 튀어나오죠. 이런 제가 쓴 산문이라 문장이 무겁고 첨예해요. 그런 무거움을 좋아하는 독자분도 있을 거라 믿고요. 다음 시집은 시간을 두고 준비하려고 해요. 다른 시인들은 편수가 쌓이더라도 그 안에서 제할 것을 제하고 벼릴 것은 벼리고 꼴을 만들어내는데, 저는 왠지 짧은 기간에 시집을 냈더라고요. 호흡을 바꿔보고 싶어서 다음에는 천천히 낼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