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소매 셔츠 레하(leha).

“이유 없이 살아가자는 말을 너무 길게 한 것 같다.” 두 번째 소설집 <노랜드>를 펴내며 천선란 작가가 남긴 문장이다. 2년간 청탁받았던 소설 10편을 엮은 이번 신간에는 살아야 할 목적은 없지만 죽어야 할 이유도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늑대 유전자를 심은 ‘강설’, 해리성 인격 장애를 겪지만 다정함을 잃지 않은 ‘제’, 외계 생명체와 사뭇 다른 태도로 조우하는 ‘이인’ 등이다. 천선란 작가는 우주만큼 캄캄한, 인간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 유년 시절 우울감과 무기력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그때의 우울과 무기력을 장작 삼아 멋진 이야기를 활활 타오르게 만든다. 그의 뜨거운 이야기가 <노랜드>에 담겨 있다.

신작 <노랜드>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이후 어떤 일상을 보내는 중인가요? 또 다른 마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있어요. 이번 신간을 통해 많은 독자를 만나려고 다양한 행사도 참여하고요. 책에 대한 반응도 열심히 찾아서 보고 있어요.

그중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사실 이 책을 발간하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간 선보인 <천 개의 파랑> <나인> <어떤 물질의 사랑> 등의 소설에서는 밝고 희망찬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어요. 어떤 고난 앞에서 절망하기보다는 극복하려고 애쓰는 인물들이죠. 하지만 <노랜드>에는 이전과 달리 사뭇 무거운 분위기에 호러 요소를 많이 가미했어요. 소설 속 인물이 절망 속에서 사는 경우가 많아 독자들에게 무겁게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했어요. 하지만 몇몇 독자가 오히려 ‘천선란의 스타일을 더욱 확고하게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반응을 보일 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의 말’에서 2년간 쓴 10편의 소설이 결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적어뒀어요. 그 얼굴은 어떤 모습인가요? 10편의 소설은 죽음을 가까이에 둔 인물이 살고자 하는 이야기, 살아야 하는 목적은 없지만 죽어야 하는 목적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제가 지금껏 쓴 소설을 쭉 돌이켜보면 죽음이라는 소재를 건들지 않는 이야기가 거의 없더라고요.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늘 의문을 품었어요. 남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각자 살아 있는 이유나 목적이 있을까? 없다면 왜 살고 있을까? 누가 우리를 탄생시켰을까? 이런 궁금증이 항상 있었어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한동안 무기력과 우울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우울감과 궁금증을 따로 떼어놓을 수 있었어요. 부정적 감정을 저 나름대로 소화하기 위해 글을 쓸 때면 존재와 죽음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는 것 같아요. 제 소설 속 인물들은 살아야 할 목적을 잃었거나 계속 찾는 중이에요. 저 역시 목적을 찾기 위해 방황하는 중이고요.

수록작 ‘두 세계’는 문학 자체에 대한 SF적 상상력이 돋보여요. 마그네틱 버튼을 관자놀이에 부착한 후 프로그램을 실행하면 소설 속 지문을 인식한 홀로그램 화면이 허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이 그중 하나죠. ‘두 세계’ 속 독자가 책의 지문을 읽는 방식은 만화의 독해와 닮았어요. 어릴 때 만화를 즐겨 본 때문인지, 그런 형식의 독해를 좋아해요. 이를테면 눈으로 지문을 따라 읽고, 관련 이미지를 이해한 후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흐름 같은 거요. 만화책이라는 매체가 아니더라도 소설 역시 이런 과정을 머릿속으로 겪는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에서 ‘두 세계’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에게’는 5페이지로 길이가 아주 짧아서 더 강렬해요. 소설을 쓰면서 가장 중요하게 드러나길 바란 점은 무엇인가요? 사실 긴 소설보다 짧은 소설을 쓰기가 더 힘들어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압축해 써야 하기 때문이죠. 보통은 주인공과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만 다뤄도 10페이지를 훌쩍 넘기거든요. 제가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제가 소설을 청탁받았던 잡지 <추적단 불꽃-우리, 다음>을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해 시위나 성명으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나 역시 함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런 이유로 ‘-에게’를 쓰기 전에 고민을 무척 많이 했어요.

<노랜드> 속 이야기에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랑의 형태는 불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사랑을 이성애 위주로 정의하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사랑의 범주를 축소하는 데 동의하지 않아요. 친구나 가족을 위해 하는 일에도 사랑이 있고,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 보니 소설을 쓸 때도 자연스럽게 다채로운 사랑의 모습을 그리게 돼요.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독자가 성별을 짐작하지 못하도록 쓰기도 하죠.

수록작 ‘옥수수밭과 형’이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공상과학소설의 이야기가 다양한 매체로 뻗어갈 활로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응하는 편인가요? 2차 창작을 흥미롭게 느끼고 환영하는 편이에요. 같은 이야기라도 소설의 형식일 때 재밌는 요소가 다르고 영화나 드라마 형식일 경우 또 다르거든요. 하나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죠. 요즘은 판권이 많이 팔리는 시대라 소설 자체에서 영화의 즐거움을 원하는 독자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소설은 소설만의 독해가 있고, 영상은 영상만의 독해가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옥수수밭과 형’을 드라마로 선보이기 위해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에요.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캐릭터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고 그다음으로 인물이 살아 숨 쉴 수 있는 배경을 만들죠.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캐릭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SF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SF 장르 창작자들은 체험해보지 못한 것을 문장이나 영상으로 설명하잖아요. 우리는 현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광활한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적 없고, 심해에서 다른 세상을 본 적 없음에도 그 장르에서는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해방감을 느낄 수 있어요. 특히 저는 SF적 상상을 많이 할수록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좋은 면도 있는 것 같아요. 당장 현실적 욕망을 해결하는 것보다 인류, 동식물, 지구가 잘 살아야 미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두운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데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요즘 SF가 그리는 미래의 설정에서 기후 위기 문제를 빼놓을 수 없어요. 1900년대, 2000년대 초반에 나온 SF는 스페이스 오페라(우주를 무대로 한 모험담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라든지 로봇과의 전쟁이나 외계인의 침공 등을 다뤘지만, 요즘은 다양한 주제에서 기후 위기 문제가 꾸준히 나오고 있어요. 지구의 환경을 개선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답답함, 무력감을 느낄 때 사람들이 SF를 많이 찾는 것 같아요. SF가 언제나 희망적인 얘기를 하지는 않아요. 때로는 모든 걸 멸망시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런 작품을 볼 때 일종의 위안을 얻어요. ‘지구의 암울한 미래를 나만 걱정하는 게 아니구나’ 이런 생각에 공명하는 거죠.

SF 소설가라는 수식어를 갖기까지 걸어온 여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나요? 어릴 때부터 ‘나는 반드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이라 다짐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공상을 했거든요. 우주 밖에 있는 존재나 고래, 투명 인간에 대한 상상을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게 재미있었고, 그런 사람이 창작자라는 걸 일찍이 깨달았죠.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순문학 위주로 공부했어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투명 인간을 상상했던 사람이 어떻게 정적인 글을 쓸 수 있겠어요.(웃음) 당시 교수님도 “네가 쓰는 소설들은 아주 거대한 장르의 도입부 같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그때부터 SF에 대한 애정을 자각하고 장르소설을 열심히 쓰기 시작했고,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천 개의 파랑>으로 수상하면서 SF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거죠.

계속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요? 이야기를 쓰는 일이 무척 즐거워요. 이야기를 쓰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아하죠. 요즘은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라는 책을 재밌게 보고 있어요. 전 세계 장례 문화와 풍습에 관한 내용이에요. 제 안의 글 쓰는 원동력은 오롯이 이야기에 서 느끼는 ‘재미’예요.

천선란 작가만의 SF물을 기대하는 독자가 많습니다. 계속된 이야기의 여정에서 작가로서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나요? 첫째는 독자에게 ‘내 취향과 상관없이 일단 재미있으니까’ 찾게 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둘째는 어떤 소설을 쓰든 경계를 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고요. 나 자신 안에 어떤 사안에 대한 윤리 의식이나 경계심이 없으면 그게 소설로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올바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해야 체화할 거라고 생각해요. 셋째는 제가 그런 과정을 거쳐 쓴 소설로 보람을 느끼고 싶어요. 독자들이 이런 점에서 힘을 얻었다고 반응하면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느끼게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