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가, 서양화가 김수자 인터뷰

김수자, ‘To Breathe’, 2021 Site-specific installation with diffraction grating film Courtesy of Leeum Museum of Art and Kimsooja Studio. _PHOTO 허승범

설치미술가, 서양화가 김수자 인터뷰
바느질이 천의 안팎을 오가는 반복이라면,
숨 역시 들숨과 날숨의 반복이죠.

이들 모두 내부와 외부 세계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간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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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미술관에 설치한 작품 ‘호흡’(2021) 안에서 인터뷰 촬영할 것을 제안하
셨지요. 햇빛을 반사해 맺히는 빛의 형상을 담아야 하는데 며칠 동안 내내 비가 와 마음을 졸였습니다. (웃음) 우리가 오늘 ‘자연’을 봤잖아요.

해가 잠깐 난 찰나에 운명적으로 촬영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럭키’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 오히려 본 것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잖아요.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고요. 늘, 항상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찰나에 대해 기억을 안 할 것 같거든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간이지만 적어도 그 순간은 우리에게 다른 시간이 되는 거죠.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변화하는 빛의 속성이 잠깐 스쳐가는,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삶과도 맞물린다는 게 내게는 흥미롭게 다가와요. 하지에는 빛이 태양처럼 바닥에 맺히는 데 이를 보기 위해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도요. 자연의 리듬에 맡기고 작업을 하는 게 나에게 새로운 요소가 되지 않았나 해요. 리움미술관 ‘호흡’ 작업을 하며 이를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됐어요.

보따리라는 가시적인 물질에서 빛과 숨이라는 비가시적 물질로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나요? 저로서는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과정이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양가적인 특성들은 늘 제 안에서 평행으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제 작업에서 보이는 물질과 비물질, 빛과 어둠, 안과 밖, 삶과 죽음 등은 이분법적인 게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생성 변동하며 교차하는 것이니까요.

‘직조 공장’(2004),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발표한<호흡: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2006) 같은 해 마드리드 크리스탈 팰리스 개인전 <호흡: 거울여인> 등을 거치며 작가에게 ‘호흡’이라는 중요한 키워드가 생겼습니다. 명상이나 요가 등 수행에서 호흡이 몸의 움직임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잖아요. 어떻게 숨에 천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숨을 먼저 생각하고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의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은 항상 ‘페인터’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은 굳이 페인터라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요. 초기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처음, 페인터로서 내 앞에 놓인 질문은 캔버스의 평면성에 관한 것이었어요. 눈앞의 평면이 과연 무엇이며, 내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관통해야 하는가가 하나의 거울처럼 내게 다가오는 질문이었거든요. 그렇게 평면을 재해석하고 관통해보려 하고 동시에 나와 내 몸, 마음을 일체화하려는 과정에서 바느질이라는 행위가 나온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아시는,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와 했던 바느질 경험을 통해 재발견한 바느질의 속성과, 이후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랩핑(wrapping) 과정에서 순환의 원리를, 또 ‘바늘여인(A Needle Woman)’을 통해 은유적(metaphotrical) 순환의 고리를 재발견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숨 역시 나 자신과의 대면으로부터 출발한 거죠. 비어있는 한 직조 공장 안에 들어가는 순간 내 몸과 숨을 의식하게 된 체험이 사운드 작업을 통해 몸의 ‘직조 공장’으로 이어진 것이죠. 숨이라는 것은 평면과 나 자신과의 어떤 대면, 타(他)와 자아와의 대면에서부터 출발한 것 같아요. 그 숨은 시각, 타를 보는 응시, 나의 눈, 그리고 타가 나에게 향하는 어떤 눈. 이를테면 질문이겠죠. 바느질이라는 행위와 연계돼 평면성을 극복하고 재해석했듯이 숨과 빛을 통해 평면성과 연계한 행위의 맥락을 확장해보는 시도인 거예요.

운동성 면에서 바느질과 호흡은 유사한 지점이 있어요. 바느질이 천의 안팎을 오가는 반복이라면, 숨 역시 들숨과 날숨의 반복이죠. 이들 모두 내부와 외부 세계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간다는 점에서 내 모든 작업의 처음과 끝은 바늘땀처럼 연계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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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키아프 서울에서 악셀 베르보르트 솔로 부스 참가 소식을 듣고 무
척 반가웠습니다. 작가님이 한국에 계시다는 소식에 더 기뻤고요. 2016년 MMCA <마음의 기하학> 전시 이후 국내 대중과 처음 만나는 자리이죠? 지금까지 한국 페어에서는 제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대중을 만날 기회가 없었죠. 한국에는 책으로도 출간된 적이 별로 없던 터라 이번 솔로 부스로 많은 관객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어 저 역시 반갑습니다. 개인전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저 나름대로는 맥락을 가져가려 했어요. 작업의 근간이 되는 오방색이라는 컬러 스펙트럼과 형성의 뿌리인 보따리를 중심으로 전개될 거예요. 그 밖에 ‘움직이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1997), 파리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보따리 트럭-이민자들(Bottari Truck-Migrateurs)’(2007) 이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마드리드 크리스탈 팰리스 개인전 등의 작업을 라이트박스로 재현한 작업도 함께 전시할 예정입니다.

국내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신작도 있죠? 가장 최근 작업 중 MMCA에서 보인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는 ‘브라만다의 검은 돌’ 형태에 오방색을 페인트 칠 하면서 그 페인팅을 하나의 랩핑(wrapping)으로 개념화 해 거울을 바닥에 깔고 반사시키는 작업이었는데 이 형태에 이번에는 오방색이 아닌, 모든 색을 완전히 흡수하는 블랙. 그야말로 완전한 블랙(blackest black)을 랩핑 했어요. 이전부터 염두한 작업이었고 2016년에 일본 나라현의 사찰 옥외에서 다른 재료로 설치했었는데 재료의 한계로 미루다가 최근 적합한 재료를 발견해 새로 제작해 실내 작업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저 스스로는 맥락이 확장됐다고 할까요. 이전까지 관계성을 중심으로 작업해왔다면, 이번에는 모든 감정과 내러티브, 콘셉트까지도 그 안에 다 흡수하여 보다 일원화하는 집합체인 셈이에요. 즉, 절대성을 가진 몸으로써의 ‘연역적 오브제’라 할 수 있죠.특히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업이라 관객이 어떻게 볼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보자기’ 연작을 통해 싸는 행위, 즉 ‘포용’의 개념이 작업의 근간이 되었죠. 보자기와 마찬가지로 빛 역시 ‘감싸다, 아우르다’라는 표현을 쓰고요. 성찰과 수행, 존재와 관계, 이해와 포용, 나눔과 공존 등 그간 작가님의 작업을 관통해온 말이 점점 희귀한 단어가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희귀해지기 때문에 우리가 되뇌어야 하는 단어이기도 하죠. 최근 세계적인 미술 흐름을 보면 환대와 공존, 수용 등 삶의 태도를 관심 있게 보고 있다고 느껴요. 이번 ‘카셀 도큐멘타 15’ 역시 이를 반영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 작업은 폭력성에 대한 반작용인 것 같아요. 이는 어쩔 수 없는 성향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예술을 하는 방법론적인 것에 있어서도 ‘하지 않는 일’, ‘하지 않으며 하는 것을 우선하는 거죠. 논두잉(non-doing), 논메이킹(non-making)은 논바이얼런스(non-violence)와 일맥상통하니까요. 어떤 것을 만들고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거나 재해석하는 것, 있는 것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해왔습니다.

타인을, 세상을 감싸는 행위의 근간은 어디에서 출발한다고 보십니까. 측은지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포용성이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배워서 알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고요. 똑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다른 어떤 개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반응하니까요. 그렇다고 한 개인이 포용을 더 할 수 있고 없고 식의 우열을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삶의 태도겠죠.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가의 차이고, 어떻게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결별도 진실의 한 맥락 속에 있는 것이겠지요. 그 역시 진실에 다가가려는 어떤 종류의 삶의 태도와 결단을 내리는 행위이니까요. 또 감싼다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차단을 의미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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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Deductive Object’, 2022 Fiberglass, steel, paint, and mirror 220x12x121cm. This image shows a similar installation at Gangoji Temple, Nara, Japan. Commissioned by Culture City of East Asia, 2016. ©Kimsooja Studio and Axel Vervoordt _PHOTO Keizo Kioku Gallery

작가님의 작품은 세계 각국을 이동하는 등 노동의 수고로움이 담기기도 합니다. 몸을 움직임으로써 성취하는 것이 분명히 있고, 이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경험인데, 그 경험은 곧 타자와의 만남이잖아요. 만남 속에서 ‘스파클’이 일어나고요. 물론 정지한 상태에서 내면을 볼 때, ‘본다’는 것은 다른 것을 보는 것이거든요. 자신 내부에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타(他)의 상태에 놓아야 하니까요. 즉,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 있지요. 이때 자기 객관화의 가장 유효한 방법론 중 하나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라 봐요. 이때는 나와 나 자신과의 대면이라기보다는 세상과의 대면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떠돌며 산 경험이 내 상상력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각과 몸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듯이, 작업으로 인한 움직임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세계를 향한 질문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작가로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죠.

20시간씩 캔버스 앞에 앉아 반복된 움직임을 거듭하며 만들어지는 수행적 측면과는 다른 수행성을 가지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제 경우는 수행을 앞세웠다기보다는 철학적 고뇌였다고 볼 수 있는 거겠죠. 철학적 질문을 통해 어떤 새로운 해답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여과하면서 예술적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에 생기는 깨달음이 있어요.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수행이라면 수행이고요. 예술적 과정과 관조를 통해 도달하는 수행적 지점이 생기는 거겠지요. 캔버스 앞에서 수십 년간 선만 그리는 분들의 차원이 있을 거고요. 제 경우에는 어떻게 보면 젠 프렉티스(zen practice)에 가깝지 않을까 해요. 제가 특정 종교를 ‘프렉티스’ 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교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저의 초기 천 작업 당시에는 돌아가신 이경성 선생님께서 저를 보고 샤먼이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영적인(spiritual)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긴 대화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km’(1997)는 작가에게 큰 전환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수행적 측면에서도, 작가로서 자리한 세계적인 인지도와 입지 면에서도요. 제게도 굉장히 기념비적인 순간(모먼트)이었죠. 왜냐하면 그 퍼포먼스를 통해서 나 자신의, 한 삶의 시기를 회고하는 그런 과정이자 작업이었으니까요. 굉장히 퍼스널하게 한 작업인데 되돌아보면 그때 마침 글로벌리즘(globalism)이 국제적으로 부상하고 있었어요. 글로벌리즘이라는 타이틀을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시기적으로 제 작품이 자연스럽게 연루되더라고요. 돌아보면 내 작업이 지극히 지역적이었기에 글로벌리즘에 합류한 것 같아요. 지금도 글로벌리즘의 한 측면에서 제 작업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죠. 글로벌리즘적인 속성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요. 제가 어떤 세계 미술의 한자리를, 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작품이 굉장히 중요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떠도는 도시들: 보따리 트럭 2,727km’(1997)는 작가에게 큰 전환이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수행적 측면에서도, 작가로서 자리한 세계적인 인지도와 입지 면에서도요. 제게도 굉장히 기념비적인 순간(모먼트)이었죠. 왜냐하면 그 퍼포먼스를 통해서 나 자신의, 한 삶의 시기를 회고하는 그런 과정이자 작업이었으니까요. 굉장히 퍼스널하게 한 작업인데 되돌아보면 그때 마침 글로벌리즘(globalism)이 국제적으로 부상하고 있었어요. 글로벌리즘이라는 타이틀을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시기적으로 제 작품이 자연스럽게 연루되더라고요. 돌아보면 내 작업이 지극히 지역적이었기에 글로벌리즘에 합류한 것 같아요. 지금도 글로벌리즘의 한 측면에서 제 작업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죠. 글로벌리즘적인 속성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부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요. 제가 어떤 세계 미술의 한자리를, 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작품이 굉장히 중요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어요.

설치미술가, 서양화가 김수자 인터뷰

김수자 ‘Bottari Truck – Migrateurs’, 2007 Duraclear photographic print in light box, 125×188.5x16cm ©Kimsooja Studio and Axel Vervoordt Gallery

내 모든 작업의 처음과 끝은
바늘땀처럼 연계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가장 큰 모먼트는 1999년 뉴욕으로의 이주이기도 했고요. ‘노매드 작가’가 돼 이주 직후 ‘바늘여인’, ‘구걸하는 여인’(2000~2001) 등의 결정적인 작품이 탄생했지요. 당시를 기억하십니까. 기억나죠. 해외에서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오히려 한국에서는 작가로서의 위상이나 입지가 없을 때였죠. 작품 판매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지만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작품 팔기를 늘 거부했었지요. 남성 지배적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열린 눈과 귀로 내 작업을 읽어주고 알아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저 자신도 뉴욕에서 감성이 더욱 열리고 자유로워져(적어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이후부터는 작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었어요. 그저 제겐 한국이 항상 적응하기 힘들고 어려웠어요.

지금은 조금 쉬워지셨습니까. 쉬워지지 않죠.(웃음) 다만 조금 편리해진 것 같아요. 뉴욕행 자체는 내게 문화적 망명(cultural exile)이었어요. 이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작가로서 활동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고, 가족 역시 ‘여기는 아니다’ 하고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가게 됐으니까요.(웃음) 여전히 제게 한국은 참 묘한 사회입니다. 모순적이고 극렬한 네거티브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동력과 에너지는 끊임없이 솟아나죠. 물론 그런 면은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동력과 에너지가 여과되고 보다 중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미래지향적인 것은 좋지만 단지 시공간적으로 앞으로 간다고 해서 거기에 다 미래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때로는 뒤로 잘 돌아갈 때도 미래는 올 수 있어요. 과잉 경쟁 시스템 속에서 자기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현상을 볼 때 견디기 어렵고 힘들죠.

폭력적인 현상은 사회 도처에 있고, 작품을 통해 내전과 난민 문제에도 천착했습니다. 폭력적 상황은 작가가 지극히 피하고 싶은 일이자 대면해야 하는 일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 오랜 시간 작업을 이어오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본인의 어떤 성향이 결국 작가의 삶을 중도에 그만두지 않게 했다고 보십니까? 그것이 문제적 문제죠.(웃음) 문제가 없다면 작업을 할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언젠가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자족적인 인간으로서 나눌 수 있을 때 그때가 내 작업이 완성되는 시점이고 또 내가 온전한 인간으로서, 존재 자체로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항상 해요.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게, 문제가 계속 생기더라고요. 어느 시점쯤에 ‘이제 해결이 되는 거 아닌가’, ‘이 시점에는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닌가’, ‘더 이상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문제들이 생겨요. 그래서 삶이 연속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 언제 그만두느냐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지만. 글쎄요, 그것이 죽음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죽음이 반드시 작업을 그만두게 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아요. 죽음 이후에도 내 작업을 바라보는 이에 의해 작업은 지속된다고 봐요. 전체 생명력 내지는 생명체의 어떤 순환 관계에서 볼 때 연속성의 일환인 거죠.

설치미술가, 서양화가 김수자 인터뷰

자족에 있어서는 굉장히 엄격하리라 생각됩니다. (웃음) 모르겠어요. 자족은 멀었죠. 아직 멀었고, 사는 게 쉽진 않아요. 작업의 여정이 쉬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단지 힘들었던 건 경제적인 요인이었죠. 이를 감당하며 해야 할 새로운 작업을 지속하는 게 어렵지, 작업 자체가 내게 힘든 적은 별로 없었어요. 작가로서 늘 질문이 있다는것, 그걸로 족하죠. 하지만 글쎄요. 스스로는 외부적인 요인들과 치열하게 부딪히며 작가로서 생존해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늘 거기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는 거니까요.

스스로 미진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이런 부분은 내가 좀 더 광범위하게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스케일 면에서, 물질적인 면에서, 질과양적인 부분에서 성에 차지 않는 상황이 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행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실행 가능한 선에서 내가 배울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해왔습니다. 신기한 건 정말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오더라고요. 이 시작과 끝에는 가족의 지원이 있었고, 작업 면에서의 지원도 전시라는 형태로, 비엔날레라는 형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어요. 훼손되고 있지만, 비엔날레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현대미술에서 새로운 개념과 담론을 창출하는 그릇이니까요. 비엔날레가 주는 질문에 제가 답을 하는 과정이 작업의 원동력이 됐고, 계속해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믿고 지원해준 갤러리들과 큐레이터, 컬렉터, 칼럼니스트 등 세계에 흩어진 많은 좋은 친구들이 있기에 견뎌온 것 같아요.

키아프 서울 일정 이후 프랑스 메츠에 위치한 생테티엔 성당의 세계 최대규모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인 ‘호흡 – 메츠 성당’의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생테티엔 성당 취임식이 9월 15일에 있어요. 매년 9월 셋째 주 주말은 프랑스와 유럽 전역이 문화유산을 기념하는 ‘유럽 문화유산의 날’인데, 올해의 문화유산으로 생테티엔 성당이 주목받게 됐어요. 이때 맞춰 8백 주년 기념 사업으로 의뢰받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일반에게 공개할 예정입니다. 생테티엔 성당은 유럽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 글라스 파사드를 가진 성당이고, 지난 각 세기마다 작가를 초청해 작업을 해왔어요. (20세기 프로젝트에는 샤갈이 초청됨) 컬렉션으로써 의미를 따지면 생테티엔 성당이야말로 가장 다양한 프랑스와 독일의 작가 컬렉션을 보유한 곳이죠. 저는 총 16개 창의 설치를 주문받았고,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와 함께 현대적 소재이자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다이크로익 유리(dichroic glass)를 동시에 사용해요.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투영하긴 하지만 아주 투명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 될 것 같습니다. 생테티엔 성당 창의 투명성과 공간성을 움직이며 변화하고, 반사하는 빛을 통해 이전에 볼 수 없던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프로젝트에 초대받아 작업을 하게 된 것을 작가로서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한국 여행자들의 발길도 많이 닿기를 기대해봅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김수자 작가의 작업을 이끄는 추동은 결국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어떤 질문을 품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요. 삶과 죽음의 그 경계, 그게 제일 큰 질문인 것 같아요. 이를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번 얘기한 적도 있어요. 앞으로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꿰매는 일을 해보고 싶다’라고 답했어요. 지금 제게 굉장히 크게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