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스카이> 속 화자는 앙상한 겨울나무가 가벼워 보인다고 말한다. 외로운 건 나무에 무거운 전구를 거는 인간들이다. 성다영 시인의 첫 시집은 자연과 세계를 향한 인간적 시선을 벗어내려는 분투로 가득하다. 자연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지닌 본래적 권위에 대해, 한 인간인 ‘나’의 정체성과 타인과의 어긋난 감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 시집은 내가 당신처럼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가 지금 밟고 있다고 말한다.

 

시집을 내고 우울했다고? 출판사 내 책 소개에 ‘시인은 시를 물화하기를 거부하고 시로도 환원될 수 없는 삶의 편에 서서 시를 쓰고자 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시집이 물화됐잖아. 그 지점에서 기분이 묘하게 좋지 않았다. 시집은 지금 나왔지만 이 안의 시들은 나에겐 지난 것들이기도 하고. 시 한 편 썼을 때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출간 블루’라는 말이 있으니 지금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하고 있다.

구성이 색다르다. 크기와 배치를 다르게 해서 같은 시를 큰 글씨와 작은 글씨 두 파트로 나누어 실었다. 내가 보내드리는 문학잡지를 보시고 아버지가 내 시집은 양장으로 크고 멋지게 나오면 좋겠다고 하셨다. 글자가 워낙 작아서 읽기 어렵다고도 하시고. 형식이 다 정해져 있는 거라 안 된다고 대답하고 나니 맘에 걸렸다. 왜 못 바꾸지? 빠르면 마흔부터 노안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집의 글씨를 크게 키우고 그에 맞게 배치를 바꾸니까 기존의 알 수 없는 문학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새롭고 직물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이 많은 시인이 시를 읽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됐다고 하시더라. 당장 고려되지 않더라도 앞으로의 문제, 시집 한 권을 읽을 때 배제되는 다른 것들에 대해 떠올릴 수 있으니 그런 역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시집을 보고 글씨가 작아서 읽기 힘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여든까지 시를 쓸 건데(웃음) 대부분의 책 속 글자 크기가 건강한 시각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이 참 이상하다.

근래의 시들에서 개인 삶의 한 부분을 디테일하게 묘사해 공통된 인간의 삶에 닿으려는 시도를 많이 한다면 성다영의 시는 공통된 인간사의 바깥에서 인간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진다.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기도하라는 말을 엄청 많이 하신다. 가끔 한번 해볼까 싶어도 내 안위를 위해 할 만한 기도가 없다. 내 식물 가게가 잘되게 해주세요, 시집이 잘 팔리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한다고 신이 들어줄까? 전혀 들어줄 것 같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다. 시도 비슷하다. 내가 우울하다고 내 힘듦을 표출하는 건 이 시를 읽을 사람에게 못할 짓 같다. 물론 누군가에겐 무척 중요한 문제겠지만. 시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있는데 고작 그걸 한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

 

 

시를 쓰도록 추동하는 것은 주로 무엇인가? 내가 봤을 땐 정말 이상한데, 사람들은 그 이상함이 자신에게 있을 때조차 일상적으로 살아간다. 그럴 때 어떤 새로운 방법으로 이 낯섦을 시에 들여올 수 있을지 고민한다.

화자의 시선이 인간을 향할 때도 있다. 그건 ‘은철’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지만 ‘은영’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더 명복’)과 위험에 처한 사람과 여자들이다. 공통된 인간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주인공이나 화자로 자주 들여온다. 많은 비율로 존재하는 사람을 계속 없다고 말하는 게 답답하고 짜증 난다. 자기 주위에는 퀴어가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 있어도 말 안 할 뿐인데.

시집 전체에서 인간으로서 자의식에서 좀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한 태도로 화자는 ‘나는 나를 가지지 않아도 버릴 수 있다’, ‘나는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처럼 탈인간적 면모를 보인다. 이는 모순적으로 자신은 타인과 구별된다는 거대한 인간적 자의식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피부’ 같은 시에서는 이 모순을 직면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인간임을 믿는다기보다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 무교라고 말하지만 종교가 아닌 다른 걸 믿지 않나. 나는 인간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싫어한다. 그런데 나도 인간이기에 당연히 인간을 벗어낼 수는 없겠지.

그런 태도를 시인이 살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의지로 이해해도 될까? 공통된 인간의 표상으로 여기는 인간과 나는 분명히 다르다고 느낀다. 내가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못 살겠다, 이 현실 세계에서.(웃음) 그런 의미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식물 가게 관련 인터뷰를 했는데 다른 식물 가게 운영자가 식물과 자신이 동등한 존재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엄청난 기만이다. 이런 식의 탈인간적 모습을 아주 싫어한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식물은 내가 물을 안 주면 죽는데, 어떻게 식물과 내가 동일한가. 그 말을 한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무언가를 만나본 적이 별로 없거나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난 짜장면, 넌 뭐 먹을래?’ 하는 상황에 놓이는 일이 많지 않나. 평등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권력은 짜여 있고, 완전히 평등한 관계는 없다. ‘우리는 평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실천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인간으로서의 모순을 어떻게 견디나? 인간이 지구를 다 망쳐놓았지만 희망도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모순된 태도 속에서 나타나는 육식 같은 것. 실천하지 않았다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시도 못 썼을 것 같다. 인생이 너무 거짓되어서.

명명하는 행위에 관한 사유가 종종 등장한다. 이름이나 생물학적 성 같은, 가장 기본적인 명칭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신이 있다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가 바라보듯이 바라보지 않을 것 같다. 식물이든, 나에 대해서든 잘못 명명되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제대로 불러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할까.(웃음)

이 세계와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드나? 그렇다. 나는 씻을 때도 거울을 잘 안 본다. 이상하다. 이게 나라는 감각이 잘 안 느껴진다. 시인이라고 하면 자아가 분명한 사람처럼 보이잖나. 그런데 나는 자아가 희박하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사회에서 날 바라보는 모든 이름이 걸맞지 않은 느낌. 모두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여자가 아닌 것 같다. 머리가 짧으니까 겨울에는 나를 남자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남자라고 해도 맞지 않다. 가끔 내가 시인인지도 잘 모르겠다. <스킨스카이>라는 시집 제목도 그런 희박한 정체성에 대한 감각에서 나왔다. 세계도 나도 아주 얇은 막만 넘으면 다른 세계일 것 같다. 여기에 있으면 불투명해서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가면 보이는데 사람들은 그 자체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 가까이 가면 세계는 별것 없고 굉장히 투명하고 얇은 막 하나에 감싸여 있을 뿐이라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드러나니까 무서운 거지.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다 보고 싶다. 그래야 직성이 풀린다. 실망하고 우울해져도.

시에서 대명사 사용을 신중히 한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대명사로 뭔가를 묶어서 지칭할 때 이미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들어간다. 문법적으로 다른 경우도 많고, 한 사람을 말할 때 성별은 물론 결혼 유무까지 생각해서 호칭을 붙인다. 한국어는 거기에서 약간 벗어나 중립적이고 지칭되지 않은 지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시를 읽을 때 인물을 어떤 사람으로 판단하고 읽으면 혼란이 와서 다시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고정관념으로 이 화자를 남자 또는 여자, 이성애자로 생각했다는 걸 나중에는 알게 되는 거다. 그런 것을 자주 의도한다.

시가 잘될 것 같은 방향이 떠오르면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나는 시를 많이 썼다. 쓰라고 하면 지금 당장도 쓴다. 시처럼 보이게 쓰는 건 쉬우니까. 그런데 쉬워 보이는 방향은 이미 내가 했던 거다. 그래서 그대로 가지 않는다. 쓸 때 재미없으니까 읽는 사람도 재미없을 것 같다.

 

 

시집을 내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출간 직전에 출간이 무산되었고,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게 되었다. 시를 이중으로 수록하는 걸 대중이 납득하지 못할 거라는 게 주된 우려였다. 이중 수록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근데 나는 이 형식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미친, 이건 무슨 형식 파괴야?’ 하지 않잖나. 이것 때문에 책을 안 내줬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등단 당시에는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가 있는 문예세계사 <신춘문예 당선 시집>에 시를 수록하는 걸 최초로 거부했다. 이후 등단하는 시인들이 같은 선택을 했다. 이런 면이 어떤 프레임을 만들진 않나? 일부러 문제를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 아니다. 나는 왜 그럴까? 둥글둥글 살면 될 텐데 왜 안 될까? 어떻게 보면 진심으로 그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긴 좀 그렇고…내가 있는 집단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이제 거기 있을 거니까. 예를 들면 내가 이사할 집이 깨끗하고 훌륭하면 좋으니까. 미리 가서 청소를 해놓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다 같이 좋으면 좋겠다.

세상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화학과를 갔다가 알 수 없어서 문학을 하게 됐다고 했다. 지금은 그 답에 가까워진 것 같나? 더 모르겠다.(웃음) 그래도 역사를 공부하며 알게 된 것이 많다. 지금 주어진 것이 정석이고 이렇게만 해야 할 것 같은데,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1백 년 전만 해도 그러지 않았네! 이때쯤 만들어진 거네?’ 이렇게. 새삼 이해하게 된 사실이라면 엄청난 시간 속에 난 아주 순간적인 존재라는 것.(웃음)

우리가 사는 이 순간은 극단적 이념과 혐오로 뒤덮여 있다. 이런 곳에서 시를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걸 나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니까 시 쓰는 게 힘들 때도 많다. 이미 이 세계의 언어를 사용해 상징 세계에 균열 내는 일을 한다는 게 이상한 거니까.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아주 가끔 가능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시에도 ‘이것으로 무얼 해야 좋을까’(‘터널안굽은길’)라는 문장이 있다. 최근 누군가에게 이런 유의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런 데 에너지 쓰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면 에너지를 어디에 쓰라는 건지… 시 쓰기 전에 시란 뭘지, 시로 뭘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한다. 답은 안 나오지만.

‘좋은 시’의 시작 노트에서 말하듯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제일 못 견디는 시는 어떤 시인가? 많아서 말하기 어렵다.(웃음) 대부분의 시, 언어로 쓰인 모든 텍스트가 한 인간을 워낙 잘 보여주니까 견디기 어렵다. 이미 알고 있기도 하고, 한 번만 보면 되는데 시집은 엄청 많이 봐야 하니까. 모든 인간의 감정이나 마음을 내가 다 알 필요는 없으니까.

아까 사진 보고 너무 시인 같다고 싫어했다. 깜짝 놀랐다. 시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탈색도 하고 이상한 옷도 입는데, 사진 속 얼굴이나 모든 것에서 풍기는 느낌이 시인 같아서…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