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6명의 필진에게 삶의 코어가 무엇이냐 묻자,
이토록 다채로운 생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오늘을 살아내며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그 무언가에 관한 6개의 이야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

이연숙(리타), 비평가

잘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을 지극히 현대적인, 산업화된 도시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다. 나는 논밭뿐인 ‘읍·면·리’에서 자랐고, 그곳은 오후 5시만 돼도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기대도 불안도 없이 묵묵히 흘러가는 농촌의 시간. 그러나 드라마나 시트콤에서 재현되는 도시, 더 구체적으로는 아파트의 매일은 달랐다. 출근길 혹은 통학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우연히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 소파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거나 냉장고에서 유리병에 든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꺼내 마시는 일, 놀이터나 편의점 같은 도시의 공유지에서 친구, 연인과 속 깊은 대화를 하는 일 같은, 지루한 일상 속 의외의 사건들. 이런 일의 반복적 패턴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 도시적 일상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게는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함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리 권태롭다 한들 일상이라는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시기했다. 나도 일상을 갖고 싶었으니까 – 마치 <보바리 부인> 속 농촌에 사는 가정주부인 엠마 보바리가 소설 속에서 묘사된 상류사회를 동경하듯이.

하지만 이제 어엿한 ‘도시인’이 된 나는 안다. 그때 그렇게 좋아 보이던 TV 속 일상은 단지 나 같은 사람들, 즉 자기가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로 하여금 좋아 ‘보이는’ 삶을 욕망하게 만들기 위해 연출된 장면일 뿐이라는 걸. 그때나 지금이나, 진짜로는 누구도 TV처럼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아 보이는 삶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다 집에 돌아와 겨우 씻고 차가운 맥주를 유일한 영혼의 위안 삼으며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스크롤링하다 잠든다. 언젠가의 ‘진짜’ 일상을 위해 오늘의 일상이 희생된다. 거의 잊혀졌지만 지난 세기 일상으로부터 혁명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상조차 분 단위로 관리되고, 판매되고, 심지어 (스마트폰을 통해) 착취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내 일상의 ‘코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지면에서 나는 지금 뭐라고 떠들고 있는 거지? 지금부터는 진짜 코어에 대한 이야기다. 삶도 사람도 다 싫을 때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을 생각한다. 그가 금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장 힘들던 시기에 쓴 작품인 <백치>에서 주인 공 나스따샤는 남자들이 자신을 ‘구매’하기 위해 들고 온 돈의 일부, 오늘날 가치로는 수십억원에 달하는 10만 루블을 불타는 벽난로에 집어 던진다. 그리고 모인 남자들 앞에서 이어지는 나스따샤의 가학적인 주문. “소매를 걷고 불 속에서 돈뭉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걸 다 끌어내면 10만 루블은 전부 당신 것 이 되는 거예요! (…) 나는 당신이 내 돈을 꺼내려고 기어 들어가는 꼴을 보고 싶어요.” 물론 아무도 돈뭉치를 꺼내기 위해 불타는 벽난로에 손을 집어넣지 않고, 나스따샤는 물끄러미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노문학자 석영중은 나스따샤가 그렇게 함으로써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자신의 짓밟힌 과거에 복수”한다고 말한다. 무시무시하고 아름다운 복수다. ‘일상’과 ‘혁명’, ‘자본’과 ‘착취’를 잘도 나불거리는 나에게는 과연 돈뭉치를 불태울 결의가 있는가. 돈뭉치를 불태우는 미친 여자의 이미지에 매료된 것일 뿐이면서, 나는 괜히 스스로에게 이렇게 자문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