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곁에서 살아가는 5명의 필자가 지금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미술을 향유할 때 일어나는 일들, 작품을 능동적으로 감상하는 방법, 주목해야 할 아시아의 신진 작가까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예술적 화두들.
예술, 삶을 바꾸는 경험
writer 김지연(미술비평가)
“우리가 살면서 이 그림을 보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될까?” 언젠가 마티스의 금붕어 그림 앞에 선 내게 친구가 건넨 말이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앙리 마티스의 회고전이었다. 1백 점이 넘는 작품을 관람하는 시간은 1~2시간 남짓, 많아야 그림 한 점당 1분에 불과했다. 언젠가 다시 마티스의 전시를 본다 해도 같은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작품과 나 사이에 주어진 것은 일생에 단 한 번, 지금의 1분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정신이 번쩍 들었고, 자세를 고쳐 잡고 마티스 특유의 선명한 색채와 자유로운 필치를 눈과 마음에 새겼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처럼. 그리고 12년이 흐른 지금,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작품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철학자 샤를 페팽의 책 <만남이라는 모험>에서는 삶에서 낯선 타인을 발견하는 사건을 예술 작품과의 만남에 비유한다. 마음을 열어둔 채 바라보면 어떤 존재가 우리 앞에 ‘우연히 솟아난다’고. 그리고 그런 갑작스러운 만남은 우리가 그동안 내려온 정의를 모두 헛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어떤 사람과의 만남은 우리의 삶을 이전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을 만나는 일도 우리 삶에 이러한 사건이 될 수 있을까?
경험으로서의 감상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본다’고 말한다. 몸으로 부딪히는 사건이라기보다 시각적 자극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현대미술은 과거보다 더욱 ‘온몸으로’ 감상해야 한다. 직접적 참여를 요하는 미디어 아트나 관객 참여형 작품은 물론, 회화나 조각처럼 전통적인 장르까지도 전시를 구성하는 데 있어 관객의 경험을 고려하고 상호작용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곧 무너질 것 같은 건물에 들어서면 목재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여관의 기둥과 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은 방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과 영상, 낱장으로 벽에 붙은 소설을 만 날 수 있다. 보안여관에서 열린 오자현의 전시 <젖은 초록의 자국>이다. 작가는 현실의 부조리한 틈새를 포착해서 소설을 쓰고, 이를 기반으로 회화와 영상을 만든다. 관람객은 마치 탐정이 된 듯 작가가 흩어놓은 단서들을 주워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사실 그림이나 영상, 몇 장의 텍스트는 하나로 완결된 작품이라기보다 관객을 분위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장치다. 관객들은 안갯속을 헤매듯 전시장을 부유하며 작가가 전하려는 현실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경험한다.
비슷한 시기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에서 열린 박해선의 전시 <이파리, 구르는 돌과 시>에서, 작가는 작은 그림들을 바닥에 두고 서로 기대거나 쌓는 형태로 설치했다. 관객은 자연스레 작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게 되고, 마침내 작은 캔버스 수십 개를 모아 만든 거대한 풀숲을 마주한다. 여기서도 관람객의 신체적 경험은 작품 감상 행위의 일부가 된다. 이름 모를 풀이 즐비한 도심 어딘가의 공터를 산책한 기분을 느낄 즈음, 버려진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긴 작가의 세계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능동적 감상을 통해 예술 작품은 문득 솟아오른 하나의 사건이 되어 관객의 세계를 침범하고, 낯선 타인의 세계를 펼쳐놓는다. 여기서부터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단순히 누군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삶의 경험이 된다. 그가 왜 버려진 것을 관찰했는지 질문하고 내 주변의 버려진 것에 눈길을 준다든지, 내가 속한 세계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사소한 하나라도 실천하려는 계기도 될 수 있다.
소설이나 영화 속 주인공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일종의 여행을 시작하고, 외부와 충돌하며 모순을 극복하는 사이에 성장한다. 기나긴 여정 중 만난 타인이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그와 하나의 사건을 공유하며 함께 변화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라는 낯선 경험을 들이는 일도 이와 같다. 능동적인 예술 감상을 통해 일상을 벗어난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 하나의 나이테가 생긴다. 인간은 절대 경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작품을 통해 낯선 세계를 만날수록 우리 삶의 두께는 점차 확장되고, 외부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다. 나의 세계 바깥에 있는 타인의 존재가 선명해질수록, 반대로 타인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의 존재 역시 또렷해진다. 예술 작품과의 마주침을 반복하는 일은 결국 삶을 지탱하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사건
더 적극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도 있다. 작가가 특정한 상황을 만들고 관람객을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이는 퍼포먼스 장르가 특히 그러하다. 태국계 예술가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는 1990년대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관람객에게 팟타이를 나눠주었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는 흔히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갤러리의 권위를 깨버렸고, 관객들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작가는 2022년 제주비엔날레에 참가해 제주의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관객을 대접했다. 역시나 대화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사람이 모인 대화의 자리에서는 늘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난다.
지난겨울 삼청동의 갤러리 신라에서도 ‘먹을 수 있는 전시’가 등장했다. 멕시코 예술가 안드레아 페레로 (Andrea Ferrero)의 <나는 평생 권력을 두려워했다>는 조각 전시이기 때문에 티라바니자보다 조용하지만 사실 더 파격적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흰색과 분홍색의 대리석 기둥은 과거 멕시코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시절, 지배 계층이 세운 서양식 건물의 일부로 사치스러운 향락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화이트 초콜릿이고, 관객은 작품을 부숴 상자에 담아 갈 수 있다. 뿌리 깊은 식민주의의 역사는 작은 나이프 하나로 쉽게 부서져 누군가의 디저트로 전락하고, 조각을 먹어 치운 관객들은 권력을 허물어뜨린 공모자가 된다. 함께 부조리한 세계를 탐구하고, 초콜릿을 먹어 치우며 권력을 무너뜨린 관객들은 서로 얼굴과 이름을 모를지라도 예술을 통해 같은 경험을 공유 한다. 이때 작품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 되고 함께 경험한 우리 사이에는 관계의 고리가 생겨난다. 타인과의 밀접한 관계가 부족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예술을 통해 느슨한 연대를 이룬다.
PHOTO (왼쪽) 야니스 엘코 (오른쪽) 스튜디오 토마스 사라세노
PHOTO 호아킨 에즈쿠라
올해 6월부터 9월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에어로센 서울>은 예술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연대를 이룰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에어로센’은 전 세계의 예술가, 활동가, 지리학자, 철학자, 과학자 등이 모인 다학제 커뮤니티로 생태 사회 정의에 관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에어로센 서울’은 세계적 예술가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와의 협력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용산 주민들이 모은 비닐 봉투 5천 장을 이어 붙여 풍선을 만든 뒤 태양열로 부양시키는 공중 뮤지엄 ‘무세오 에어로솔라’, 태양열로 하늘을 부유하는 휴대용 비행 키트로 함께 비행해보는 워크숍 ‘에어로센 백팩’으로 구성된다. 공생하는 내일을 희망하며 같이 머리를 맞댄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확실한 건 공유하는 경험이 많을수록 우리의 연대가 끈끈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개인이 예술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듯 우리 사회가 버틸 수 있는 근육을 단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Мarina Abramovic)가 확언했듯 ‘예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 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경험한 우리는 각자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정확히는 외부와 부딪혀 깨지고, 타인의 삶을 상상하면서 나의 세계를 확장함으로써 마침내 다른 곳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이 모여 세상의 변화를 만든다.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바뀌는 것은 없다. 지금 여기, 생동하는 미술의 현장에서 우리가 나누려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