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 캐릭터를 알파벳 삼아 자신만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작가 파비앙 베르쉐르(Fabien Verschaere)가 개인전 <눈치(Nunchi)>를 통해 제안하는, ‘눈치껏’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하여.
촬영하는 내내 보여준 재치 있는 모습에 자꾸만 미소를 짓게 되더라.(웃음)
즐거운 촬영이었다.(웃음) 작가로서 대중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지한 모습보다는 평소에 감춰둔 내 유머러스한 면을 꺼내 보이는 것을 즐긴다.
2019년에 열린 일민미술관 기획전 이후 개인전 <눈치 (Nunchi)>로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자하문로에 위치한 갤러리 네 곳에서 동시에 전시를 개최하는 경험은 어땠나?
예상보다 전시 규모가 커진 덕에 초기 작품과 최근 작업을 한데 모아 소개할 수 있어 의미 있는 기회라 생각한다. 프랑스에서 전시할 때는 아크릴 작업과 수채화 작업을 분리해 선보이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 개인전에서는 재료에 따라 작품을 구분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전시 공간을 구성할 수 있어 신선한 경험이었다.
개인전 제목인 ‘눈치(Nunchi)’에 대해 먼저 묻고 싶다. 우리가 아는 그 한국말 ‘눈치’를 뜻하나?
맞다. 프랑스 배우 알랭 샤바가 출연한 영화 <#아이 엠 히어>의 한 장면을 통해 이 단어를 처음 접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수’(배두나)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서울에 온 ‘스테판’(알랭 샤 바)에게 눈치가 없다고 핀잔을 주면서 그 의미를 설명하 는 장면이 있는데, 프랑스어에는 눈치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몹시 애를 먹는다. 평소 유니크한 대상에 흥미를 느끼는데, 그래서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이 단어에 호기심이 생겼다.
전시 작품을 구성하며 ‘눈치’라는 주제에 대해 어떤 고려를 했나?
눈치란 게 말하지 않아도 상황으로 미루어 이해하는 것, 그러니까 굉장히 미묘한 개념이지 않나.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여기에 착안해 어떤 요소 하나를 더했을 때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데 초점을 맞춰 전시 작품을 구성했다. 이를 위해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떠오르는 영감을 즉흥적으로 캔버스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해왔다. 회화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처럼 말이다. 한 가지 주제나 재료에 갇히지 않고 명상하듯 흐름이 끊기지 않게 스케치해가는 데 중점을 뒀다.
마치 이야기를 풀어가듯 막힘없이 이어가는 데생 방식이 인상적이다. 작품의 형상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우연성에 기대 작업해나가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도안을 만들어두고 그대로 따라 그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 붓을 집어 든 순간 느끼는 감정에 집중해 빈 공간을 채워가듯 그려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내게 알파벳 같은 존재다. 여러 알파벳이 모여 문장을 이루는 것처럼, 한 캔버스에 여러 캐릭터를 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평상시에 작은 캔버스에 개별 캐릭터를 그려보며 외관을 결정한 뒤에, 더 큰 규모의 작업에서 주제에 따라 그 순간에 떠오르는 캐릭터를 즉흥적으로 꺼내 그리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꽃과 나무 같은 자연 소재부터 로봇과 해골, 배트맨과 피노키오까지 한 캔버스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캐릭터가 담겨 있다.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
여행지에서 포착한 일상적 소재부터 만화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캐릭터, 꿈에서 본 몽환적인 형상까지 현실과 판타지의 세계
를 자유롭게 오가며 얻는다.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의 핵심은 변형에 있다. 일상적 소재는 개인적 상상을 더해 전형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탈바꿈시키고, 꿈에서 본 비현실적 대상은 반대로 현실 소재와 연결지어 표현한다. 흔히 공포스러운 이미지로 자주 묘사되는 해골을 아름답거나 발랄한 이미지로 그리는 걸 즐기는 이유다.
캐릭터 개발을 위해 일상에서 접하는 흥미로운 대상의 외관이나 이미지를 기록해두기도 하나?
작업에 앞서 도안을 만들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캐릭터를 작업하기 전에도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는 편이다. 흥미로운 대상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거나 크로키로 남겨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당시 받은 인상만을 뇌리에 남겨두고 혼자서 충분히 소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기억에 의거해 표현하는 과정에서 전형을 벗어난 아이디어가 탄생하고, 나만의 회화 스타일이 만들어진다.
동화나 신화를 기반으로 하거나 상상만으로 구현한 하이브리드 생명체도 자주 등장한다. 작품에 꾸준히 판타지적 요소를 담게 된 계기가 있나?
어릴 때 왜소증을 앓아 병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게 병원 너머의 세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나는 신체적 한계에 낙담하는 대신 그에 대해 인식 자체를 하지 않은 채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집중했다. 그 무렵 탐닉하던 동화와 신화 속 캐릭터, 악몽을 꾸며 느낀 두려운 감정들이 모두 작업의 자양분이 됐다.
한국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에서 쓰이던 꼭두 인형, 민속신앙 속 호랑이와 구미호 등 여러 작업에 걸쳐 한국의 전통문화와 토속신앙에서 영감 받아 만든 캐릭터가 등장한다. 전통 소재가 지닌 어떤 면에 흥미를 느끼나?
꼭두 인형과 구미호, 돌하르방 같은 캐릭터는 모두 서울과 부산, 제주 등 한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접한 소재다. 이런 소재를 통해 먼 옛날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유추하는 재미가 있고, 대중 문화가 시작되고 발전한 토대라 생각해 어느 나라를 여 행하든 그곳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탐구하는 편이다. 현대미술에서 전통적 소재가 갖는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정작 한국의 젊은 관객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웃음)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접한 다양한 문화적 상징을 작업에 녹여내는 일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나?
한국 영화 <기생충>을 인상 깊게 봤는데,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은 건 모두가 공유하는 일상적 공간을 배경으로 예 상치 못한 전개를 만들어낸 덕분이라고 본다. 나는 이처럼 국적이나 문화권을 떠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이나 감정을 재해석해 색다른 관점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즐긴다. 그래서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 같다. 보는 이에 따라 작품의 의미나 의도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Fabien Verschaere, Courtesy Woong Gallery
©Fabien Verschaere, Courtesy Woong Gallery
캐릭터 각각이 저마다 품은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전시장을 찾는 관객이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주길 바라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지어낸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지만, 작품에 대해 말할 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해설을 더하지 않는 편이다. 간혹 특정 캐릭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또는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겼는지 직접적으로 묻는 경우가 있다. 그 또한 작품을 받아들이는 그만의 방식일 테니 그럴 땐 내 생각을 이야기해주지만, 그저 하나의 제안처럼 받아들여주길 바란다고 덧붙여 말하곤 한다. 작가의 말은 때로 관객의 해석을 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지 않나. 이 캐릭터들이 품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관객이 알아서 발견해주길 바란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그게 곧 전시를 ‘눈치껏’ 감상하는 방법이겠다.
그렇다. 당신 앞에 놓인 작품 자체를 그저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눈치껏 말이다.(웃음)
파비앙 베르쉐르, <눈치(Nunchi)>
기간 | 2024년 8월 29일~9월 28일
장소 | 웅갤러리, 본화랑, 갤러리 비앤에스, 부암아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