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떠나야 한다. 한 해의 수심(愁心)은 비워내고, 반짝이는 풍경들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11월을 여는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훌쩍 떠나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랐다. 마음을 넉넉하게 채울 책과 영화, 술 그리고 음악과 함께. 다섯 곳의 여행지에서 우리의 가을이 보다 찬란한 빛으로 물들길 바라며.
회복하고 깨어내며, 제주 횡단
한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어김없이 제주도의 건조한 가을 풍경이 떠오른다. 반짝이는 제주의 여름 햇살 아래 부서지는 파도도, 무릎을 덮을 만큼 가득 쌓인 겨울의 눈밭도 아껴 마지않는 광경이지만, 몇 번이고 나를 제주로 데려다 놓는 것은 적당한 채도로 물든 단풍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생동하는 가을 바다다. 그 고요한 정취를 흠뻑 느끼며, 올가을에는 제주의 자연에 파묻혀 오래도록 걷고 싶다. 11월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미식을 즐기며 활기를 되찾고, 다도와 요가로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며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감각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중문과 애월, 성산과 구좌, 제주의 사면을 가로지르며 이어질 3일간의 여정, 그 여정을 풍요롭게 채워줄 일곱 가지 장소와 이야기.
키아나요가
3일간의 여정에서 루틴처럼 지키고 싶은 단 하나의 계획이 있다면 제주의 광활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 즐기는 아침 요가다. 서귀포 남쪽의 작은 어촌 마을인 사계리에 자리한 ‘키아나요가’는 산방산과 한라산이 한눈에 보이는 사계해변의 방파제에서 수련을 이어가는 바다 요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며 굳은 몸을 구석구석 풀어낸 뒤 마침내 사바 아사나에 접어들 때, 요가원 천장 대신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온몸을 이완하는 순간.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해 제주에 왔다는 생각이 들겠지 싶다.
add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남로50번길 1
instagram @kyanayoga_sagye
연화차
요가 수련 후에 마시는 차 한잔은 몸뿐 아니라 마음에 쌓인 피로까지 풀어낸다. 윗밤오름과 알밤오름 사이, 선흘리에 자리한 ‘연화차’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부부가 재료 수확부터 제다 작업까지 수작업 공정을 거쳐 만든 수제 차를 선보이는 티 하우스다. 도라지, 당근, 귤껍질 등 제주 자연에서 자라는 야생초를 직접 채취해 뜨거운 솥에서 아홉 번씩 찻잎을 덖고 말리는 방식을 거쳐 만드는 연화차의 수제 차에는 재료 본연이 지닌 복합적인 맛이 섬세하게 살아 있다. 다도 클래스를 통해 체질에 맞는 차를 추천받을 수 있어, 올겨울 즐겨 마실 만한 차를 새롭게 탐색해볼 계획이다.
add 제주시 조천읍 선교로 46
instagram @yeonhwa.tea
무디타
별다른 일정 없이 숙소에서 오롯이 하루를 보내도 아쉬움이 없을 공간이다. 애월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 잡은 ‘무디타’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호스트가 오래도록 빈 채로 남아 있던 할아버지의 옛 창고를 개조해 완성한 독채 숙소다. 작은 방에 나 있는 창을 열면 곧장 이어지는 뒤뜰의 툇마루가 이번 여행에서 무디타를 찾으려는 이유다. 이곳에 자리를 펴고 누워 온종일 수산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끝까지 마치고 싶다. 해 질 무렵에는 저수지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와 거실 한편에 마련된 현무암 자쿠지에서 몸을 녹이며 내일을 준비해본다.
add 제주시 애월읍 수산서3길 11-4
instagram @mudita.jeju
포도뮤지엄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올해 포도뮤지엄이 선보이는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빨라진 삶의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 더 먼 미래를 그려보게 만든다. 노화의 과정에서 겪는 인지 저하증을 화두 삼아 시간의 유한함, 과거를 향한 그리움, 기억의 불완전한 속성에 대해 10인의 작가가 풀어낸 저마다의 사유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어머니의 일상 속 명랑한 모습을 기록한 쉐릴 세인트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부터 방의 모퉁이를 썰어낸 듯한 형상으로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시각화한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까지, 고독의 순간을 딛고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예술에 있다는 사실을 얼마간 마음에 품고 지내게 될 것 같다.
add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788
instagram @podomuseum
포티파이브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바에서 칵테일이나 와인 한 잔으로 갈증을 씻어낼 때, 비로소 여행 중이란 사실을 깨닫곤 한다. ‘포티파이브’는 지난 제주 여행에서 그렇게 발견한 보석 같은 공간이다. 3개월에 한 번씩 의외의 계절 재료를 활용해 시즈널 칵테일을 선보이는 이곳은 재료의 향과 형태, 질감을 활용하는 방식 면에서 바텐더의 독특한 위트가 묻어난다. 올가을에 만날 수 있는 칵테일 중 특히 맛보고 싶은 메뉴는 ‘어텀 퍼퓸 no.2’. 사과 증류주에 팔로산토 스틱을 담가 우디한 향을 더하고, 엘더플라워와 무화과 잎을 사용해 가을 재료의 다채로운 향을 표현한 칵테일이다.
add 제주시 도령로 18 2F
instagram @fortyfive.jeju
도립(DORIP)
제주의 숨은 비경을 꼽으라면 코난해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에메랄드빛 해변을 한없이 바라보다 배가 고파지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와인 바 ‘도립’으로 향할 생각이다. 하루 한 타임, 여섯 가지 요리와 디저트로 이루어진 디너 코스를 제공하는 도립은 까다로운 입맛으로 ‘맛집’이란 호칭을 쉽게 붙이는 법이 없던 제주도민 지인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다. 식사에 앞서 레스토랑 맞은편에 마련돼 있는 와인 창고로 이동해 음식과 페어링할 와인을 직접 고르는 재미가 있다. 제주 제철 식재료로 만든 정갈한 요리가 2시간가량 충분한 여유를 두고 제공되니, 동행과 길고 긴 대화를 나누며 즐겨볼 예정이다.
add 제주 구좌읍 행원로5길 33
instagram @dorip.jeju
유콜잇러브
모든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서울에 남기고 온 과업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는 바이닐과 턴테이블이 준비된 리스닝 바로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지금의 여정에 집중해본다. 올해 초 노형동에 오픈한 ‘유콜잇러브’는 이호테우해변을 바라보며 LP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내도음악상가의 두 번째 공간으로, 낮에는 재즈와 올드팝, 밤에는 팝과 펑크, 소울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선곡한다. 제주에서의 시간을 추억할 때마다 서울에서 찾아 듣게 될 한 곡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add 제주시 월랑로8길 22
instagram @youcallitlove.jeju
Beach House <Depression Cherry>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대자연의 경치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앨범이 하나 있다. 바로 비치 하우스의 정규 5집 . 우주를 떠도는 듯한 몽환적인 선율을 듣고 있으면, 거대한 자연 속을 떠다니는 한 줌의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가 된 것처럼 한없이 초연해진다. 제주의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듣고 싶은 곡은 6번 트랙 ‘P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