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떠나야 한다. 한 해의 수심(愁心)은 비워내고, 반짝이는 풍경들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11월을 여는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훌쩍 떠나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랐다. 마음을 넉넉하게 채울 책과 영화, 술 그리고 음악과 함께. 다섯 곳의 여행지에서 우리의 가을이 보다 찬란한 빛으로 물들길 바라며.
아름다움으로 씻어내는, 동해 일주
올해도 많은 일을 했다. 11월호를 만드는 지금은 한 해를 다 살아낸 것만 같다. 바쁘다는 이유로 놓치고, 망친 것들이 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수리,
수선해야 할 시간이 마침내 주어졌다. 12월까지 남은 시간은 가장 고운 모습으로 살아야지. 선선하고, 잔잔해지기 위해 어디로 가면 좋을까. 강원도라면 산 같은 사람도, 바다 같은 사람도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는 가장 깊은 산속에 몸을 묻고, 하루는 가장 드넓은 파도 앞에 설 작정이다. 정선부터 삼척까지. 곳곳에 산재한 아름다움을 마음 깊이 채우겠다. 경이로운 풍경으로, 문장으로, 선율로.
서로재
강원도의 가장 북쪽, 강릉이나 양양, 삼척의 소란함과는 멀찍이 발을 떼고 있는 고성. 강원도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게 고성 덕분이다. 한적한 고성에서도 유난히 한적한 마을 삼포리에는 늪이 있고 풀이 무성해 풀이름 순(荀)에 호수 포(浦)를 쓰는 ‘순포 마을’이 있다. 순포 마을에 자리한 서로재는 바다와 숲, 호수를 품은 자연 속에 어떻게 건축이 순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간결한 콘크리트가 따뜻한 질감을 낼 수 있으며, 과묵한 건축이 고요한 사위와 어떻게 조화로울 수 있는지를 단 하룻밤 묵는 것으로 수긍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름처럼 새벽녘 가라앉은 공기와 이슬 맺힌 풍경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2022년 젊은건축가상을 받은 카인드 건축사사무소의 작품.
add 강원 고성군 죽왕면 봉수대길 118
새비재
비대한 자아로 무거울 때는 거대한 스케일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몸으로 확인해야만 가벼워질 수 있다. 정선의 새비재는 ‘새가 나는 형상’, ‘조비치(鳥飛峙)’라고도 불리는 고갯길이다. 광활한 배추밭과 옥수수밭, 메밀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아름다움은 사위가 암흑으로 덮이는 순간 시작된다. 공기 맑은 가을, 은하수와 유성우가 하늘을 가득 채운다.
add 강원 정선군 신동읍 방제리
취호가
사람이 숨을 쉬고 잠을 자기에 가장 좋은 고도가 해발 700m라는 사실을 취호가 덕분에 알게 됐다. 평창의 해발 700m에 자리한 이곳. 푸른 소나무 숲을 앞에 둔 히노키 탕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기꺼이 떠나고 싶어진다. 깊은 밤, 새비재에서 은하수를 담고 온 깨끗한 마음을 이곳에 뉘이고 싶다.
add 강원 평창군 진부면 호명길 313-31
instagram @chwihoga
한강 <희랍어 시간>
마감하는 사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언제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지’ 싶다가도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며 소스라친다. 이틀 사이 그의 책이 50만 부나 판매되었다. 이 요란스러운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여행길에 한강 작가의 책을 가져가기란 쉽지 않다. 누군가 인생의 책을 묻는다면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대번에 꼽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두 책의 첫 장을 다시 열려면 바위 같은 용기가 필요하니까. <희랍어 시간>은 그의 작가적 정체성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와 소설의 경계를 아름답게 넘나든다. 분량은 비교적 짧지만 유려한 문장에 감탄하고 복기하느라 시간이 꽤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순간을 그린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깨끗해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강원도에 하나뿐인, 유일한 독립·예술영화관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감독과 배우를 인터뷰 할 때면 번번이 자신들의 예술적 원천이 신영극장임을 고백하는, 강릉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곳이다.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을 운영하는 강릉씨네마떼끄는 매년 여름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주최하는 이들이기도 한데, 이들이 차려내는 기획전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가령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을 연다 하면 <해피 아워> <드라이브 마이카> 등의 대표작은 물론이고 그간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던 감독의 초기작 <열정> <심도> <친밀함> 등의 장편 극영화 전편을 모조리 다 모아 상영하는 식이다. 11월쯤에는 션 베이커의 <아노라>가 상영되고 있을 것 같다. 신영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를 남겨둬야겠다.
add 강원 강릉시 경강로 2100
instagram @indiesy
백건우 <그라나도스 – 고예스카스>
(비교적) 무명의 스페인 음악가의 곡을 음반으로 완성한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보며 모종의 벅차오름을 느낀 적이 있다. 그가 청년 시절, 뉴욕에서 처음 들은 후 40여 년 간 내내 오랜 꿈으로 품어온 엔리케 그라나도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쇼팽과 슈만, 라흐마니노프, 브람스에 침잠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엔리케 그라나도스를 소망했을 한 예술가의 긴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실제 이 음반을 발매하며 그는 “어느 정도 마음의 자유를 찾은 거 같기도 하고, 그게 필요한 거 같기도 해요. 나이가 들면서 음악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러면서 또 친해지는 느낌도 들어요. 이젠 음악과 제가 서로 포옹해주고 받아주는 느낌이에요”라고 그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한 예술가의 긴 생애를 동시대에 서서 바라보는 기쁨이란 이런 것이겠지. ‘고예스카스’는 엔리케 그라나도스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람회를 본 후 받은 영감을 음악으로 구현해낸 작품으로 낭만과 서정이 강처럼 흐른다.
문우당서림
오랜 시간을 버티며 그 도시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길러냈을 지역 서점에는 경외감이 든다. 1984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우당서림’은 속초 사람들의 한 평생을 곁에서 함께 살아온 동네 서점이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오로지 서점 에디션’을 만날 수 있는데, 전국 5곳의 서점과 협업해 시대와 국가, 언어를 가리지 않고 선정한 양서 다섯 권을 리커버 에디션으로 선보인다. 지난 6월 두 번째 ‘오로지 서점 에디션’이 발매됐다.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근처의 동아 서점도 함께 들러야 할 곳.
add 강원 속초시 중앙로 45
instagram @moonwoodang_bookshop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우연히 박수근 화백이 열여덟 살에 ‘조선미술전’(선전)에서 입선한 작품 ‘봄이 오다’(1932)를 본 적이 있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무의 선이, 빈 농가의 음영이, 쓸쓸하고도 다정한 그 풍경이 내내 마음을 쓰다듬었다. 불편함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목도하게 만드는 서슬 퍼런 현대미술의 전위와 전복에 매혹되다가도 마음이 허약한 때에는 ‘진짜 삶’을 살아내며 생을 다지듯 물감을 쌓고 굳히기를 반복한 박수근의 담백한 그림이 보고 싶어진다. 인제에 다다르기 전 그의 고향 양구에 자리한 박수근미술관에 먼저 들르려 한다.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소장품 특별전 <박수근: 평범한 날들의 찬란한 하루>가 열리고 있다.
add 강원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instagram @parksookeun_museum
신흥사
이른 아침, 사찰 산책만큼 호사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여행지가 정해지면 그 지역의 사찰을 검색한다. 서울에서는 길상사를, 고창에서는 선운사를, 산청에서는 수선사를 걷는다. 삼척의 신흥사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지로 사찰 곳곳이 아름다운 장면마다 등장한다. 영화 속 소리를 수집하던 대나무 숲이 바로 이 절 뒤편에 자리해 있다. 영화에서 바닷소리를 녹음한 곳은 바로 근처의 근덕면 맹방 해수욕장이다.
add 강원 삼척시 양리길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