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떠나야 한다. 한 해의 수심(愁心)은 비워내고, 반짝이는 풍경들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 11월을 여는 저마다의 마음가짐으로,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훌쩍 떠나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랐다. 마음을 넉넉하게 채울 책과 영화, 술 그리고 음악과 함께. 다섯 곳의 여행지에서 우리의 가을이 보다 찬란한 빛으로 물들길 바라며.

지금 가장 풍부한 읽을거리, 광주로

지난 9월, <마리 넥스트>의 첫 미디어 아티스트로 선정된 상희 작가와 인터뷰를 마치고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던 중 광주 이야기가 나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 레지던시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자연스레 광주로 놀러 오라는 말을 건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도 좋고, 지금과 다음 세대의 예술을 탐닉할 거리도 많다며 혹할 만한 초대를 해주었다. ‘언젠간 가야지’ 하며 그 시점을 막연하게 가늠하고 있었는데, 한 달 뒤에 광주의 자랑인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소식을 접하곤 ‘지금이다’ 싶었다. 게다가 광주비엔날레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아랍 국가로 카타르 파빌리온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메일로 받는 순간, 광주는 가야만 하는 곳이 되었다. 문학과 미술의 에너지로 일렁이는 지금의 광주를 목도하고 싶어졌다. 맛있는 음식은 덤으로.

유유한

별다른 일정이 없어도 여행은 고단하다. 그런데 이번엔 도시 곳곳에서 펼쳐지는 비엔날레를 즐겨야 하니, 숙소만큼은 고요하고 포근해야만 한다. 그 조건 하나로 ‘유유한’을 찾아냈다. 한가로이 느릿느릿한 모양이란 뜻의 사자성어 유유한한(悠悠閑閑)에서 영감을 받아 지었다는 이름부터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처럼 그곳에서 쉬는 동안은 여유롭게 차 한 잔을 하면서 보낼 작정이다. 동백나무가 있는 마당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서점 ‘이것은 서점이 아니다’에서 사 온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add 광주 동구 백서로224번길 6-6 1층
instagram @yuyuhan.kr

코다

요즘은 어느 지역을 여행하든 커피 맛이 좋은 카페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더 까다로워진다. 향이 풍부한 커피, 비주얼과 맛 모두 훌륭한 디저트, 깔끔하면서도 감각이 돋보이는 공간 구성, 그리고 음악까지. 매 지역마다 궁극의 카페 하나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으로 열성을 다해 찾는데, 그 과정을 지나 광주에선 동명동에 자리한 코다를 만났다. 목재로 만든 거대한 문과 공간 곳곳에 불규칙하게 놓인 식물들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는데, 광주에서 커피 맛집으로 유명했던 메저린오피스를 만든 이들이 탄생시킨 카페라고 하니 커피 맛도 보장되겠다 싶다. 매달 새로운 디저트를 선보인다는 점도 흥미롭고. 게다가 밤 12시까지 문을 여는 흔치 않은 카페라, 밤 산책을 하고 그냥 숙소로 가기엔 왠지 아쉬울 때 들러도 좋을 것 같다.

add 광주 동구 동명로14번길 9 1층
instagram @coda.prologue

알랭

어딜 가나 맛으로는 아쉬울 일 없는 전라도 여행이니 굳이 맛집을 찾아 다닐 생각은 없다.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다 동네 어르신들이 북적이는 곳이라면 들어가볼 작정이다. 유일한 계획이라면 프렌치 레스토랑 ‘알랭’을 예약해 즐기는 것이다. 얼마 전 동명동에서 용봉동(전남대 후문)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알랭은 장르를 불문하고 맛으로는 어느 지역보다 엄격한 광주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레스토랑이다. 지역 식자재를 활용한 알랭 코스나 클래식 코스도 좋지만, 가장 궁금한 건 다양한 채소 플레이트를 선보이는 채식 코스다. 지난봄부터 시작한 맛있는 채식 탐험기를 광주에서도 이어가볼 생각이다.

add 광주 북구 호동로 3-6 2층
instagram @alainmodernfrench

광주비엔날레

더 늦기 전에 광주를 가야만 하는 이유는 ‘광주비엔날레’가 12월 1일로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2016년 광주비엔날레 포럼에서 소설 <소년이 온다>의 일부를 낭독한 한강 작가는 올해도 비엔날레와 인연을 맺었다. 개막 공연에선 직접 작성하고 낭송한 글과 함께 퍼포먼스가 펼쳐졌고, 본전시 섹션의 소제목 ‘부딪힘 소리’, ‘겹침 소리’, ‘처음 소리’를 작명하며 올해 전시의 기획이 우리말로 잘 전달되는 데에 힘을 더해주었다. 그 소리의 정체를 감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시작으로 양림문화샘터, 옛 파출소 건물, 양림쌀롱 등 총 9개 장소에서 펼쳐지는 전시를 다급하지 않게 하나씩 감상할 생각이다. 특히 해외 미술 신을 탐구할 수 있는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이 역대 가장 많은 수인 31개나 참여한다고 하니, 웬만한 수학여행보다 더 빠듯한 미술 여행이 될 듯하다. 비엔날레의 장점이 그런 것 같다. 단기간에 예술 경험을 엄청나게 확장시켜주는 것. 그리고 굿즈. 마음에 드는 굿즈 하나는 있어야 할 텐데….

add 광주 북구 비엔날레로 111
instagram @gwangjubiennale

백현진 <모과>

광주 가는 길, 차에 모과 한 덩이를 둘 참이다.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다 점점 진하게 스며드는 모과와 가을은 퍽 닮았다. 이 생각이 백현진의 싱글 ‘모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과 냄새 서서히 진동을 하네 / 그러더니 온 사방에 모과 냄새 퍼지네’. 은은하고 향긋한 이 음악을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하다 보면 광주에 가는 길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이것은 서점이 아니다

한강 작가를 향한 축하의 세리머니는 광주에서 사서 읽는 책 한 권으로 하려 한다. 비록 한시적일지라도 모두가 책을 읽는 문화가 일어나는 게 작가가 바라는 유일한 세리머니일 것 같기 때문이다. 서점 추천은 상희 작가에게 받았다. 제법 반항적이면서도 귀여운 이름만으로도 갈 이유가 충분했는데, 서가에 들이는 책 선정의 기준이 ‘읽어본 책’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혹은 ‘세상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인가’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빼앗겼다. 게다가 서점이 아닌 날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연, 강연, 교육, 소모임이 이어진다니 여행 날짜에 맞춰서 벌어지는 행사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여행지에서 작은 동네 서점들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찾은 책 한 권이 어떤 땐 여행의 전부가 될 때도 있으니.

add 광주 동구 충장로22번길 8-12 101호
instagram @notbookstore_

‘이서점’ 추천 도서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여지없이 생각나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책. 겨울을 기다리며, 밤의 몽상 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