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얼굴이 있다면 어떤 형상일까. 유독 흐리고 추운 얼굴의 낱낱을 세밀히 그려내는 것이 시(詩)가 하는 일이라면, 이 지면에 등장하는 4명의 시인들은 오늘 이 순간 가장 도전적이고 예리한 붓이다. 무의미를 이겨내고, 쓸모의 강압 앞에서 의연히 자기 질문을 짊어지는 이들. 사유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네 시인의 첫 시집. 가장 빛나는 초상.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강지이

너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걸어온다

‘여름 샐러드’ 중에서

오버사이즈 재킷, 펜슬 스커트 모두 Sportmax, 하이넥 톱 MaxMara. 부츠는 에디터 소장품.

2025년 1월 12일 일요일 오전 10시, -12°C까지 떨어진 기온에 마침내 한강이 얼었다. 하얀 강은 얼음의 결정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찬 공기를 가르며, 시인 강지이는 그가 직조한 문장처럼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한강 변을 걸었다. 무던함과 씩씩함을 조금 보태어. 멀리서 그를 보는데, 마치 그 모습이 그가 써내는 시의 한 단락 같았다. 빛을 가득 머금은 찰나의 풍경. 순간이란 오직 지금, 이 자리에서만 존재한다는 생의 진실을 공들여 유려하게 펼쳐내는 그의 시 같은. “얼음을 발로 많이 깨고 다녀서 재미있었어요. 근교에 살거든요. 산책을 많이 하는데 자연과 가까이 닿아 있어서 다양한 걸 마구 밟고 다녀요. 벌레도 잘 잡고.(웃음)”

강지이 시인의 첫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나의 친구들 과 가족들에게”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40여 편의 시를 지나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 /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 / 사라지지 않는다.”로 가닿는다. 다정하고 결연한 선언으로 열고, 닫는 그의 시집은 춥고 낮은 마음을 데우고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그의 시가 그저 천진한 위로로만 다가오지 않는 건 절망과 비애의 끝에 닿아본 적 있는 이가 맹세하는 낙관 같기 때문이다. 강지이의 시집 속 화자는 “나는 물속에서 / 잃어 버린 것을 / 나무 속에서 찾는 사람”(‘설국’)이고, “비장한 무언가를 비웃고만 싶”(‘비가 지 나가면 알림을’)다. 그러다 “내일은 내가 자주 죽었”(‘수압’)으며, “오늘은 내가 매번 살아 있고 / 그것이 이상하다”(‘수압’)고 느끼는 이이기 때문이다. 삶에 동반되는, 필연적인 비 애와 너저분함, 자조와 비관을 직시하는 태도를 지닌 이, 깊이 가라앉고 떠오르기를 수차 례 반복해본 이만이 획득할 수 있는 코어 강한 긍정성은 읽는 이에게 그 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영화 <일 포스티노> 속 ‘마리오’의 대사처럼.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의 시작은 소설이었다. “어느 순간 소설이 내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고민하던 차에 전공 필수과목이던 시 창작 수업을 들었어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라는 건 선택받은 자들의 것이라는 미신적 환상, 신화적 상상이 있었어요. 나는 절대 쓸 수 없는 것이라 여기던 때에 수업에서 몇 번 칭찬을 들었어요. 그게 응원이 됐고요. 그러다 김종삼 시인의 ‘주름 간 대리석’이라는 시를 만났어요.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構造)의 대리석(大理石) / 그 마당(寺院) 한구석 / 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내려 앉았다”(‘주름 간 대리석’)를 읽는데 정지된 풍경에 불현듯 나뭇잎이 흩날리잖아요. 일순간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이 몸으로 다가왔어요. ‘아, 이 시는 작동하는 시구나, 나도 이런 시를 쓰고 싶다’ 하는 욕심이 생겼어요. “읽는데 어떤 문장이 깊이 새겨질 때가 있잖아요. 시가 작동하는 순간, 그게 멋있는 것 같아요.”

강지이의 시는 주로 풍경 안에서 묘사로서 작동한다. 그가 직조하는 시어들의 묶음은 종국에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고, 한 품에 안긴다. “시로 쓰고, 구현하고 싶은 걸 자연에서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천변을 산책하다 갑자기 가슴을 뛰게 하는 공기나 바람 같은 것을 만날 때. 그런 걸 시로 옮기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죠.(웃음) 특정 장면을 문장으로 구현해 이미지 자체로 그 느낌을 전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자연 외에도 도로 위 간판, 마트의 상품들, 건축물을 봐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그때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단편적 문장이나 단어, 감상을 적어둬요. 메모가 꽤 모였다 싶으면 이것들을 조합하고 해체하며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하고요. 그렇게 이미지들을 타고, 흘러가면서 시를 완성해가고 있어요.” 나아가 그가 펼쳐내는 조각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엮이는 데는 특유의 차분한 리듬의 공이 크다. “묵독했을 때 느껴지는 리듬감에 신경을 쓰는 편이에요. 끊기지 않게 계속 읽을 수 있도록요. 퇴고할 때는 쭉 읽어보고, 뚝뚝 끊어지는 것들을 연결할 수 있게 단어를 고심해요. 어떤 한 시에서 동일한 단어가 반복되면 운율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지나치면 지루해지거든요. 연상되는 비슷한 단어를 넣어보고, 빼보고, 구조적으로는 해체하고 분해하는 작업을 많이 해요.”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표지의 윤슬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시집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빛을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찬란하고 희망차게, 때로는 찬란해서 절망적이게. “어두워지면 너는 물처럼 투명해졌다 나는 여름엔 수영을 했다 물 밑에 빛이 가득했다 / 강 밑에 은하수가 있었다”(‘여름’), “내 머리카락이 물에 휩쓸려 요동칠 때 / 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는 정오의 빛이 지나가 항상 /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 / 그런 것을 생각하고 금세 잊어버린다”(‘수영법’), “하루의 마지막 햇빛이 희미하게 끓고 있는 물 위를 일직선으로 / 통과한다”(‘수압’). 페이지 사이사이 빛은 고여 있고, 번지고, 흘러넘친다.

“자연이나 빛, 물 등은 그저 존재할 뿐이지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잖아요. 그래서 시에 자주 가져다 쓰는 것 같아요. 시가 좋은 것도 같은 이유예요. 시는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도달점이 있는 장르가 아니잖아요. 읽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문장이 다르고, 해석이 다른 가능성의 문학이라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오해당하면 당할수록 좋은 것 같아요. 자기만의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요. 나아가 1년 전에 읽었을 때와 10년 전에 읽었을 때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요.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은 좋을 수 있고, 그리고 나중에는 완전히 별로일 수 있죠.” 시가 지닌 불완전성은 그가 시를 쓰고 읽는 기쁨이다. 불완전 안에서 그는 쓰고, 자주 실패하고, 배운다. “인상적인 풍경을 볼 때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이를 구현해보려 애쓰지만, 결국 어느 순간 구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돼요. 당연히 구현할 수 없고,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는데 그 실패에서 따라오는, 그 실패가 불러들이는 이미지와 새로운 문장들이 있어요. 그 실패의 잔여물들이 오히려 시에 다른 국면을 만들어주기도 해요.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시로부터 배우는 것 같아요.” 애써 실패하는 여정 속에도 즐거움은 있다. “어떤 때는 막힘없이 써지거든요. 그럴 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마음에 든 시는 거의 다 그렇게 써졌어요. ‘오, 잘되는데?’ 이런 느낌으로. 이미지가 계속 연상되고 그 연상이 이어지는 순간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도파민 중독자라.(웃음)”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이 세계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요새 어이없는 상황이 많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지거든요. 근데 할 말이 없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세상에 대한 애정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제 본 빛과 오늘 본 빛이 다름을 느끼는 것처럼. 세계를 유심히 보며 계속 알아가고자 하는 흥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가를 떠나보내기 전, 인터뷰 중에 그가 이야기한 스마트폰 메모장, 시의 재료를 담아두는 바구니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강가에 날아다니는 물오리들을 보고 있어요. 이를 소재로 연작을 쓰려고 해요. (스마트폰 메모장의 스크롤을 내리며) 중력이라는 단어가 있네요. 할머니의 심부름 목록이 있고… 리얼 가이즈의 ‘리얼 가이즈’ 가사가 있네요? 웃겨서 적어둔 것 같은데… 왜 이런 거밖에 없지? 큰일 났네.(웃음)”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의 마흔한 번째 시, ‘VOID’는 시집의 펼친 두 면 전체가 새하얗게, 드넓게 비워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 단 두 행의 시가 적혀 있다. “언니, 큰 공간은 우리의 / 것이에요.” 아, 어떻게 그의 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곧 더 크고, 넓고, 울창한 곳에서 그의 시를 다시 만나길. 큰 공간은 우리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