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그 무엇으로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욕망은 일종의 내면적 저항이다.”
올해 미우미우 문학 클럽에 함께한 작가 매건 놀런이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읽고 전해온 목소리.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 미우미우가 패션을 넘어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꾸준히 실천해온 일이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한 ‘미우미우 문학 클럽(Miu Miu Literary Club)’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 4월 밀라노에서 개최한 이번 미우미우 문학 클럽은 저명하고 독창적인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며 ‘성, 욕망, 그리고 동의’를 주제로 대담을 진행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소설 <A Girl’s Story>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작가 매건 놀런(Megan Nolan)이 대담 이후 든 생각을 전해왔다. 아일랜드의 1990년대생 여성 작가로서 그가 실천하고 지향해온 가치에 대하여.

아니 에르노는 문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여성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순간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서른 즈음에 아니 에르노의 글을 처음 읽었다. 그때가 에르노를 만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청소년기의 사건이나 어린 시절의 집착을 계속 붙들고 있는 게 작가로서의 성장이나 대중의 인정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남몰래 품고 있었다. 그 무렵에 접한 에르노 문학은 자신의 과거를 정제된 언어로 날카롭게 다루고 있었다. 그의 문장을 읽어나가면서 ‘어떤 사건이든 섬세하고 예리하게 다룬다면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사소한 일이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배웠다.

당신 또한 여성의 충동과 욕망을 직설적이고 강렬하게 그려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현대의 젊은 여성 작가로서 아니 에르노에게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당연하다. 그런데 에르노의 세계와 가장 맞닿아 있는 내 첫 소설 <Acts of Desperation>을 쓰기 전에는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웃음)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다행이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기 전에 특정한 주제를 그토록 정교하고 우아하게 표현해내는 거장의 글을 접했다면 지레 겁을 먹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에르노 문학의 의미를 성별에 한정 짓거나 여성 소설의 표상으로 바라보고 싶진 않지만, 그의 영향력은 분명하다. 에르노가 낙태와 성적 집착, 거절 같은 주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높이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용기를 심어준다고 생각한다.

미우미우 문학 클럽에서 다룬 아니 에르노의 <A Girl’s Story>는 1950년대를 배경으 로 10대 여성의 첫 성적 경험을 다루며 수치심으로 부서진 정체성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결코 현재의 여성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와 국가를 떠나 어느 사회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억압이 존재하는 듯한데, 이를 언제 자각하게 된다고 보나?

여성에 대한 억압은 대부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듯하다. 특정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랄 땐 그 안에 내재된 억압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보편적인 예로 사춘기 남녀의 성적 관심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를 들 수 있다. 소년의 호기심은 웃어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조금이라도 호기심을 드러낸 소녀에게는 수치심을 안기고 심지어 타락한 존재로 여기기까지 한다. 성관계를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 죄악시하는 거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90~2000년대 아일랜드에도 비공식적 방식의 감시가 존재했는데, 당시에는 그게 잘못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이 같은 억압으로 인한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지금도 두 눈에 선연히 보인다.

‘욕망의 정치성(Politics of Desire)’을 주제로 진행한 이번 미우미우 문학 클럽은 욕망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권리를 규정하는 힘이자 하나의 급진적인 저항의 행위’. 이날 당신은 욕망에 대해 “급진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두려운 것”이라 말했는데, 그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 바란다.

욕망은 개인의 신념이나 정치적 입장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정치적 환경과 무의식 등 수많은 변수가 얽힌 결과일 테니까. 하지만 욕망 자체는 그 무엇으로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타인에게 어떤 행동을 강요할 수는 있어도, 원치 않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기에 욕망은 일종의 내면적 저항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욕망은 흥미로워진다.

여성의 욕망과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향후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라나?

여성의 욕망에 대한 논의는 더더욱 포용적인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이 각자의 욕망을 찾아내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권리를 갖는 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여성의 욕망은 타당하다’는 인식이 개인을 넘어 집단적 이해로 확장되고, ‘진정한 동등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것. 그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다양한 여성 서사를 접하는 경험이 여성의 삶에 대해 고찰하는 계기가 되어줄 듯하다. 더 나아가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를 변화시키거나 해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내가 첫 소설을 쓰면서 시도한 방식에 대해 “한 여성을 파멸로 이끈 원인을 파고드는 일종의 법의학적 조사”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서술할 때,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접근한다는 게 나와 아니 에르노의 공통점 중 하나다. 과거의 경험을 무작정 외면하거나 냉소하는 게 아니라, 충분한 거리를 둔 채 인내심과 엄격한 태도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거다. 이를 해내겠다는 의지와 노력은 그 자체로 아주 강력하다.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서툴거나 추하게 여겨지는 이야기일지라도 단순하고 정확하게 글로 옮기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게 문학 안에서 ‘정직함’이 지닌 힘을 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외신의 평이 떠오른다. “아무리 진실이 추악하더라도, 수치심을 치유하는 방법은 정직함’이라는 것이 매건 놀런의 주요한 글쓰기 원칙인 듯하다.” 정직하게 써나가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 짐작되는데 어떤가?

맞다. 모든 선택은 미세한 영향을 무수히 받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동기에 대해 오롯이 정직해지기 어렵다. 어쩌면 완전히 정직해지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정직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 않나. 그 시도가 타인이 강요하는 서사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보다 단연 가치 있다고 믿는다.

여성의 이야기를 글로 써나갈 때 무엇을 중시하거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본인이 쓰는 이야기가 모든 여성의 서사로 치부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내 소설을 읽고 큰 분노를 보인 독자는 대체로 “나였다면 주인공처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응한 여성들이다. 나 역시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술의 역사에 여성 서사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여성 작가에게는 ‘글을 통해 대중을 대표해야 한다’는 불공평한 압박이 따라붙는 듯하다. 남성 작가처럼 여성 작가도 자기만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때로는 부끄러운 면면까지도 있는 그대로 쓸 권리가 주어져야 마땅하다.

여성 문학을 쓰고 읽는 일이 여성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여성 작가이자 독자로서 앞으로 어떤 여성 서사를 만나기를 기대하나?

나는 다양성의 확장을 가치 있게 여긴다. 그렇기에 ‘삶의 무한한 방식’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여성에게 조용히 살아가고, 단정히 존재하며, 쉽게 사라지라고 부추긴다. 마른 몸에 집착하거나, 남편에게 의존하는 아내의 삶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아직도 목격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말해온 것보다 훨씬 많은 형태의 삶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 사실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