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뚜벅뚜벅, 규칙적으로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 땅을 일정하게 울리면 곧 거대한 모래벌레(샤이 훌루드)가 찾아와 일대의 모든 것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래벌레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아라키스 행성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모래벌레가 생명 활동을 하며 산소를 뿜어내기 때문이니까. 오직 아라키스에서만 나는, 온 우주에서 가장 귀한 물질인 ‘스파이스’도 모래벌레가 만들어 낸다. 그래서 아라키스의 원주민 프레멘은 독특한 걸음걸이를 개발해 냈다. 마치 춤추듯 불규칙하게 걷는 것이다. 이곳으로 이주해 온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분)도 이 걸음걸이를 익힌다. 하나 그의 걸음은 어쩐지 서툴고, 프레멘 소녀 챠니(젠데이아 분)은 그런 폴을 보고 꼭 취한 것 같다고 말한다. ‘듄: 파트 2’는 165분 내내 폴의 취한 걸음을 좇는 영화다. 삐끗하면 대재앙을 불러올 그 걸음을.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 놓인 경계선은 사막의 모래 폭풍에 휩싸인 듯 희미하다. 작은 충격에도 깨어질 만큼 얄팍하기도 하다. 아라키스의 이방인이던 폴은 몇 가지 통과 의례를 거치며 빠르게 프레멘의 일부가 되고, 이내 리더로까지 추앙받는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철천지원수라고만 생각했던 하코넨의 피가 실은 폴에게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때, 폴은 물론 관객도 혼란을 느낀다. 내집단과 외집단의 경계는 이토록 모호하다. 또 결정적으로 폴은 아라키스를 초록빛 낙원으로 바꾸어 줄 메시아(리산 알 가입)라는 기대를 받는 이인 동시에, 광적인 믿음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성전에 불을 당기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래벌레도 마찬가지다. 모래벌레는 경외의 대상인 동시에, ‘생명의 물’을 만들거나 빠르고 효과적인 이동을 하기 위해 도구화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듄’의 세계에서 선과 악, 자아와 타자의 구분은 계속해서 뒤집히고 무너진다.
혼란 속에서 ‘듄: 파트 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예지와 운명을 말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일견 주인공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운명’의 ‘운’은 ‘움직일 운(運)’이다. ‘듄: 파트 2’도 결국 어떤 선택으로 미래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묻는 작품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우리는 여러 갈래의 미래 앞에서 비틀대던 폴의 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본다. 그는 프레멘 군중 앞에서 메시아를 자처한다. 리산 알 가입으로서의 미래를 ‘선택’한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으므로’.
당신이 보기에도 그러한가? 당신에게 최선의 미래란 무엇인가? 그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이 질문은 트릴로지로 기획된 이 영화 시리즈의 마지막 편, ‘듄: 파트 3’에서 더 깊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