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면 어김없이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극장 밖을 나와도 쉼 없이 영화, 영화, 또 영화 이야기만이 가득하다. 매년 5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이 가장 뜨거워지는 나날들. 제77회 칸영화제의 열기 안에 머물던 날의 기록을 남긴다.
“여러분은 이 상영관까지 오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나요? 저는 이곳에 오는 데까지 50년이 걸렸습니다.” 말로만 듣던 레드카펫을 지나(실은 상영 시간에 맞추느라 전력 질주했던) 뤼미에르 극장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인지하지 못했던 ‘칸영화제’를 몸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베테랑 2>로 드디어 이 레드카펫을 밟은 류승완 감독이 눈시울을 붉히며 전하는 소감에는 20년 넘게 평단의 지 지와 관객의 박수를 숱하게 받아온 감독의 마음 한 편에 남아 있던 오랜 꿈, 소망이 비쳤다.
그래서 올해 유독 저조한 한국 영화의 출석률이 더욱 아쉬웠다. 한번 꽂힌 건 끝을 보고야 마는 ‘서도 철’(황정민) 형사와 광역수사대 동료들의 두 번째 수사극으로 전작의 활기는 유지한 채 선과 악, 정의 의 경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 구조로 몰입도를 높인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테랑 2>, 영화인의 친구, 아버지, 선배로 한국 영화의 길을 도모해온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삶을 다 룬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인 임유리 감독의 단 편영화 <메아리>까지. 제77회 칸영화제에는 총 세 편의 한국 영화가 각각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칸 클래식, 라 시네프 부문에 초청되었다. 올해 칸에서 한국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좋은 영화 가 없어서라기엔 영화 산업 지원 예산 삭감과 이로 인해 영화진흥위원회가 해마다 개최해온 ‘한국 영화의 밤’ 행사가 열리지 않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열기 가득한 영화제 현장에 빠져들며 발견한 올해의 화두는 ‘여성’이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1983년생 여성 감독 그레타 거윅은 영화계에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등장하는 게 반갑다는 말로 영화제의 포문을 열었고, 개막식에서 가장 뜨거운 박수가 나온 순간은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조지 루카스 감독, 지브리 스튜디오와 함께 배우 메릴 스트립의 이름이 호명될 때였다. “당신은 우리가 영화 속 여성들을 보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이 영화를 통해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왔어요.” 배우 줄리엣 비노슈가 상을 건네며 그에게 전한 이 말은 올해의 칸영화제를 대변하는 메시지로 해석해도 무방했다.
이 화두는 경쟁 부문에서 더 선명히 마주할 수 있었다. 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무는 이들을 조망해온 션 베이커 감독은 신작 <아노 라>를 통해 성 노동자 문제를 꺼내 들었다. 뉴욕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러시아 부호의 아들을 만나 충동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남자의 부모가 이를 취소하려 들이닥치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존재하는 상류층과 하층민 사이의 간극을 상기시키며 호평받았고, 끝내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빛나는 여성은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영화 <올 위 이매진 애즈 라이트> 속 두 주인공임을 고백하고 싶다. 인도 뭄바이에 사는 두 여성의 여행을 담은 이 영화는 여성의 욕망과 연대가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제목만큼이나 아름다운 형태로 드러낸다. 물론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영화 <에밀리아 페레스> 속 배 우 4인 중 최초의 트랜스젠더 배우 수상자로 화제를 모은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눈물도 빼놓을 순 없다.
한편 칸영화제가 오래도록 사랑해온 거장 감독들의 재입성은 그 자체로 ‘영화로운’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앞서 언급한 <에밀리 아 페레스>의 자크 오디아르부터 <지옥의 묵시록> 이후 35년 만에 신작 <메갈로폴리스>로 칸을 찾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오, 캐나다>로 돌아온 폴 슈레이더, 아시아 영화 중 유일하게 경쟁 부문에 오른 <코트 바이 더 타이즈>의 지아장커, 그리고 <더 슈라우즈>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까지. 자신의 세계를 무던히 갈고닦아온 마스터의 행보에 결승선은 없어 보였다.
아시아 영화의 약진은 독창적이고 신선한 작품을 모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제66회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에서 스물두 살의 나이로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오쿠야마 히로시의 신작 <마이 선샤인>부터 민 키 쯔엉 감독의 <비엣 앤 남>,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작품으로는 처음 주목받은 타우픽 알자이디 감독의 <노라>를 선보인 이 부문의 대상은 관후 감독 의 <블랙 도그>가 차지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정비 작업의 일환으로 유기견 포획 임무를 맡은 남자와 떠돌이 개의 만남을 그린 이 영화는 누아르의 그림 안에서 궤도 밖으로 내몰린 두 존재, 사람과 동물이 서로를 구원하는 드라마를 담 아내며 세심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Christophe Simon
칸에 머무는 동안 매일 부지런히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봤음에도 떠날 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는 곧 한국에서 어떤 영화를 개봉할까 하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이토록 다양하고 풍요로운 영화 중에 국내 관객이 만나게 될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영화제가 끝나기도 전에 접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개봉 소식은 반가웠지만, 다양성에 인색해진 영화관에서 상영될 영화는 어쩐지 손에 꼽힐 듯하다. 그럼에도 희망을 놓지 말라던 메릴 스트립의 말을 기억하며, 내일의 영화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