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불행을 정공으로 표현할 때,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존재에 공감하며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오승욱 감독은 ‘잘 표현된 불행’의 힘을 믿는다.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들어간 전직 경찰이 출소 후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직진하는 이야기.’ 영화 <리볼버>는 억울한 복역에 대한 보상인 돈과 아파트를 받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수영’(전도연)을 조명한다. 불굴의 집념을 품은 채 나아가는 수영의 얼굴은 타오르는 내면에 비해 차분하고, 그의 행동은 폭력의 영역을 벗어난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 사람을 그려내며 오승욱 감독은 불행을 정공으로 표현한다. ‘잘 표현된 불행’이 우리 삶의 고통을 딛고 설 수 있는 힘을 전한다고 믿으며.

오승욱 감독 리볼버 부산국제영화제 전도연 지창욱 임지연 revolver
셔츠, 팬츠, 슈즈,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리볼버>가 지난 8월에 개봉했다. <무뢰한> 이후 무려 9년 만의 신작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9년을 보냈다. 영화는 전작과 신작의 편차가 심한, 흥미로우면서도 무서운 분야라고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품은 채 <리볼버>를 만들어갔다. 지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영화가 완성되니 그간의 힘듦이 눈 녹듯이 사라지더라. 관객의 반응이 어떨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봉을 맞았는데, 언제나 그랬듯 허점들이 보여 마냥 뿌듯하진 않았다. 개봉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약간 쓸쓸하기도 하다.(웃음)

이번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

날씨가 흐린 어느 날, 아침부터 산속의 절에서 야외 촬영을 했다. 배우들이 분장한 상태로 앉아 있고, 카메라가 준비되어 있고, 새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모두가 각자의 자리 에서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릴 때 유난히 신선한 기운을 느꼈다. 조용한 열정이 감도는 현장이었다. 그곳에서 전도연 배우가 선장처럼 중심을 잡아주었다.

전도연 배우와 <무뢰한>에 이어 또 한번 협업했다.

전도연 배우와 함께할 때, 고민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걱정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 그의 연기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지가 유일한 문제였다. 그래서 촬영할 때 바짝 긴장했다.(웃음) 한 번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으니 배우의 연기를 포착하는 방식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고, 배우도 이런 나를 믿어줬다. 큰 그림만 공유하면 그 이후부터는 배우가 더욱 훌륭하게 구현해준 덕분에 행복하게 촬영했다.

<리볼버>의 시나리오가 전도연 배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전도연 배우의 좋은 면면이 시나리오에 녹아 있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람이 몇백 명씩 죽어나가는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웃음) 내가 느낀 전도연 배우는 동정심이 있고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데 중점을 두고 시나리오를 써 나갔다. 그 결과 마음은 부글부글 끓지만 차분해 보이는, 내면을 쉽사리 표출하지 않는 수영이란 캐릭터가 탄생했다. 수영이 꾹꾹 억눌러온 마음을 펼쳐내기는커녕 오히려 비워내는 마지막 장면을 쓸 때 특히 기분이 좋았다.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 일찌감치 엔딩을 정해두었다고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만든 영화 중 가장 명확했다. 시나리오를 쓰던 시기에 고(故) 황현산 선생의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을 인상 깊게 읽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불행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단순히 불행을 강조하기보다는 불행이 긍정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

그 바람을 구체화하며 어떤 생각을 했나?

1930~1950년대 하드보일드 작품들을 떠올렸다. 일례로 로스 맥도널드의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어떤 진상이 드러나는데, 그게 세상에 공개되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기 때문에 다시 묻어버린다. 내 영화에서도 이런 점을 다루고 싶었다.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그러다 끝내 타인을 해치는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그려내고자 했다.

완성한 시나리오를 영화로 구현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나?

<리볼버>는 ‘얼굴의 영화’라는 점만큼은 고수하려고 했다. 대사의 양이 많은 편인데, 대사 보다 인물의 얼굴에서 더 많은 것이 느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 형용사나 부사를 덜어내며 대사의 본질을 남기려 했고, 표정만으로 리듬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얼굴에 집중하는 영화인데도 클로즈업 장면이 많지 않고, 인물들의 표정도 다채롭지 않다. 시나리오에 ‘무표정’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고 들었다.

무표정 속에서 인물들의 생각이 읽힐 수 있기를 바랐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도 수많은 감정이 내포된 듯한 수영의 표정이 제일 놀라웠는데, 상상조차 못한 힘이 느껴졌다. 취조실에서 감정을 과하지 않게 드러낸 ‘석용’(이정재)의 표정, 고개를 스윽 돌릴 뿐인데도 복합적인 감정이 발산된 ‘그레이스’(전혜진)의 표정도 참 좋았다.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수영에게 보상을 약속했던 ‘앤디’(지창욱),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수영을 돕는 ‘윤선’(임지연)의 활약도 돋보인다. 이들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이야기에 웃음을 더해준다.

영화의 세계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가 ‘그로테스크’다.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슬프게 느껴지는 인물들을 그려내는 거다. 갑옷을 갖춰 입었지만 그 사이로 땀이 새고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인물들에게 담아내고자 했다.

범죄영화에서 기대할 법한 폭력적인 장면이 적은 것도 인상적이다.

<무뢰한>에서도 알 수 있듯, 나는 잔인한 장면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웃음) 그런데 <리볼버>는 폭력성이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폭력적인 장면을 뱉어내는 작품이라고 느꼈다. 그게 이 영화가 내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하게 15세 이상 관람가인 이유이기도 하다. 잔혹한 장면을 넣지 않아도 세상의 잔혹성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승욱 감독 리볼버 부산국제영화제 전도연 지창욱 임지연 revolver

그렇다면 <리볼버>는 세상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다. 영화의 제목으로 ‘리볼버’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리볼버가 저주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했다. 수영이 돈과 아파트를 되찾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총을 쓰는 것이다. 한데 그러면 살인을 저지르며 더욱 큰 죄를 짓게 되지 않나. 수영이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승리가 아닐까 싶었다.

범죄를 배제하며 약속된 보상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수영의 집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나?

복수심이 만들어낸 집념은 아닌 듯하다. 2년간의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나온 수영은 투명 인간에 가깝다. 수영이 얼마나 더 나락으로 빠져드는지 보고 싶어 하거나, 수영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려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다. 이때 수영은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무시당한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그나마 사람답게 살기 위해, 수영은 약속된 보상을 기어코 받아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본다. 나로서 살고 싶다는 것, 그게 수영에게서 불굴의 집념을 이끌어낸 셈이다.

그 집념이 생에 대한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 수영처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태도에서 인간이 지닌 존엄이 느껴진다.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이상적일 것 같나?

이상적이기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사회에 가깝지 않을까. 한데 그런 사회를 이루는 게 쉬운 일 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웃음)

<킬리만자로>와 <무뢰한> 사이에는 15년, <무뢰한>과 <리볼버> 사이에는 9년의 간극이 있다. 다작하는 편이 아닌 만큼 각 작품이 특별하게 여겨질 듯한데, <리볼버>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것 같나?

세 번째 영화라서 그런지 이제는 스태프들이 ‘오승욱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내가 감독으로서 지닌 개성을 알아봐주니 놀랍고 감사하다. 한편으론 현재의 상태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조금씩 깨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오승욱 감독의 다음을 쉽게 예측할 수 없겠다.

비슷한 얘기를 또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은 있다. 그건 따를 수밖에 없는 듯하다. 작업이 진전되지 않을 때, 어린 시절부터 좋아해온 것들을 되짚어본 적이 있다. 만화로 읽었던 <레미제라블>과 <로드 짐>, 이소룡의 영화, 알랭 드롱이 주연한 <암흑가의 세 사람> 등을 떠올리니 ‘내가 지금껏 탐닉 해온 것들이 내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구나’ 싶더라. 감독으로서 내 핵심을 보다 잘 표현하며 관객의 심금을 더 울릴 수 있었으면 한다.

그 핵심이 관객에게 어떻게 가닿기를 바라나?

영화는 현실을 잊게 하기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나. 내 작품은 후자에 가깝다. 영화가 불행을 정공으로 표현할 때,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존재에 공감하며 외로움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관객에게 영화라는 러브레터를 꾸준히 보내고 싶다.

<리볼버>의 극장 상영은 마무리되었지만, 스크린을 통해 볼 기회가 남아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_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되었다.

영화제 기간에 부산으로 내려가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석할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하니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즈음, 감독 한 명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패를 이뤄 감독이 선정한 작품들을 보러 다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마치 소풍을 떠난 유치원생들처럼, 다 같이 줄지어 다니며 계속 영화를 봤다. 그러다 다른 감독의 무리를 만나면 서로 “우린 이 영화 보러 간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마지막 영화를 보러 가기 전, 해운대 해변에서 와인을 마시며 앞서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무나 즐거웠다. 그때 그분들 다 뭐 하고 지내시려나…(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