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한층 넓어진 지평 위에서 서른한 번째 축제의 서막을 연다.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신작과 비범한 신예들의 수작부터 영화가 남긴 발자취를 되짚고 동시대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주는 작품까지, 올해 부산을 채울 다채로운 영화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열흘간 이어질 영화의 향연 속에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저마다의 한 장면을 품어가길.
가장 지금의 한국 영화
WRITER 차한비(영화 기자)

수많은 선택지가 놓인 영화제의 시간표 앞에서 매해 고민은 깊어진다. 반드시 관람해야 할 작품을 가려낼 수 있는 정답은 없지만 지금 스크린 앞에서 어떤 영화를 만나고 싶은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선택의 기준은 명확해진다. 올해의 한국 영화는 촘촘한 서사부터 배우의 변신, 현실을 비트는 유머, 역사에서 지워진 목소리와 쉽게 헤아릴 수 없는 마음까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불러 모은다.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연출과 배우들의 긴밀한 연기 호흡을 기대한다면 ‘한국영화의 오늘’ 상영작 중 <사피엔스>를 눈여겨보자. 납치 사건으로 시작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품은 여러 인격을 오가며 엇갈린 진술을 내놓는 용의자를 통해 긴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용의자로 분한 배우 정성일이 인물을 변화무쌍하게 그려내고, 그를 추적하는 인물을 맡은 배우 유재명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맞서며 작품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최종면접>은 밀실의 압박감을 취업 면접장으로 옮겨 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여섯 청년의 엇갈린 기억을 따라간다. 영화는 사건의 진상보다 불안과 조바심이 적대감으로 번지는 과정을 파고들며 배우 김재원과 조이현을 중심으로, 젊은 배우진의 앙상블이 인물 사이의 긴장을 더욱 밀도 높게 쌓아 올린다.
유머 속에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세대유감>과 <수능, 출제의 비밀>을 권한다. <세대유감>은 종가와 제사를 둘러싼 소동을 통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자부심이 다른 세대에게는 굴레일 수 있음을 드러내고, <수능, 출제의 비밀>에서는 한 지방 학교 교사가 수능 출제 합숙소의 견고한 서열에 균열을 내며 이야기가 흘러간다. 두 영화 모두 가족과 교육에서 오래전 뿌리내린 권위를 유머러스하게 비틀며 좀처럼 바뀌지 않는 한국 사회의 고착된 헤게모니 방식을 돌아보게 한다.

<자필>과 <여전히 찬란하게>는 폭력의 시간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계속되는 삶을 바라본다. <자필>은 단단하게 쌓아 올린 드라마 속에서 과연 누가 진실을 기록할 권리를 갖는지, 공인된 사실은 누구의 진실을 대변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배우 정성일과 박지현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공적 기록과 개인의 기억 사이에 벌어진 간극을 마주한다. 배우 김혜자가 9년 만에 선택한 스크린 복귀작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여전히 찬란하게>는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두 여성의 굴곡진 삶을 깊은 우정으로 감싸며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시간을 복원하는 데 힘쓴다.
새롭게 주목할 이름으로는 윤단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첫세계>를 표시해두기를 권한다.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에서 가족의 내밀한 감정을 공간과 표정 곳곳에 머물게 했던 감독은 작은 섬에서 재회한 두 청춘을 따라 선뜻 이름 붙이기 어려운 마음의 파동을 더듬는다.

한편 온 스크린 섹션에서는 빠른 호흡과 장르적 쾌감을 지닌 작품들이 펼쳐진다. <꿀알바>는 빚에 내몰린 청년들이 고수익 아르바이트에 뛰어들며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현장은 이름과 달리 괴물과 살인마가 출몰하는 핏빛 무대로 뒤바뀐다. 김다민 감독은 ‘죽도록 일한다’는 말을 섬뜩한 현실로 밀어붙이며 배우 이재욱, 김민하, 고민시를 비롯한 배우진과 함께 기상천외한 세계에 활력을 더한다. <푸른길>에서는 배우 손석구와 나가야마 에이타가 국경을 넘나드는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한다. 전작에서 상반된 두 인물의 대립과 연대를 서사의 동력으로 바꾸며 탁월한 장악력을 보여준 한준희 감독의 작품으로, 개성이 서로 다른 두 배우가 펼치는 연기력과 공조수사 과정에서 부딪치고 호흡을 맞춰가는 관계를 드러낸다.
한 편의 영화를 고른다는 것은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진실을 의심하는 사람, 경직된 사회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 빼앗긴 언어를 되찾고 낯선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과 나란히 앉는다.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을 향해 기꺼이 한 걸음 내딛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영화제를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