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아니고요

때는 4년 전, 나보다 일곱 살 많은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기 전에 고픈 배를 채우려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에서는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한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왔고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얼굴을 맞댄 채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때 남자친구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얘도 참, 여자 잘못 만나서 인생 망쳤지.” 당시 그 밴드의 보컬은 사귀던 여자가 임신을 해서 기쁘게 결혼을 발표한 참이었다. 나는 놀라서 얼굴을 떼며 말했다. “얘가 무슨 인생을 망쳐. 이 노래 몇 주째 차트 1위고 예쁜 사람이랑 결혼해서 엄청 행복해 보이던데.” 그러자 그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인생 막 잘 풀리려고 하는데 그 여자가 앞길 막은 거잖아.” 이게 무슨 황당한 논리인가. 당시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그 커플 중 한 명의 인생이 꼭 망가져야 남자친구의 속이 시원하다면 그건 당연히 여자 쪽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따지면 여자는 무슨 죄야. 한창 어리고 예쁠 때 남자 새끼가 조절 하나 제대로 못해서 임신하고 꽃다운 시절을 애 키우면서 보내게 생겼잖아.” 테이블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더니 “우리 ◯◯가 아직 잘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부터 영화가 시작되기까지 내 머릿속은 터질 것 같았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길래 ‘여자 잘못 만나서 인생 망쳤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걸까? 관계는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강남역 사건을 기해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됐고 얼마 전 그 남자의 친구로부터 그가 큰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가 된 사람은 그가 결혼을 기점으로 사업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백 퍼센트 아내인 자기 탓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알까? C 브랜드 홍보 담당, M

 

 

입으로만 페미니스트

A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자주 참고했던 블로그의 주인이었다. 블로그에 쓴 글을 책으로 펴내 누군가에게는 ’작가님’ 소리를 듣는 그는 대학생 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누나들의 영향으로 페미니즘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진보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고 글 역시 그런 성향이 강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오빠를 가족으로 둔 나는 약속한 듯 그의 글에 매료됐고, 주고받기 시작한 댓글이 실제의 만남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 관계로 이어졌다. 그런데 사귀고 나니 그에게서 의외의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결혼할 나이가 훌쩍 지난 그는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내게 결혼에 대한 압박을 가하며 우리가 결혼을 한다면 자기가 조금 더 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내가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도 일 때문에 매일 스트레스 받으니까 서로 윈윈 아닐까?” 당시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기에 세상 가장 이성적인 척하며 내놓는 그의 말에 휩쓸릴 뻔했던 것도 사실이다. 결정적인 일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전화 통화에서 벌어졌다. 목소리가 좋지 않아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계 모임에 가셨는데 저녁을 안 차려두고 가서 밥을 못 먹었다’는 것이다. 조금 놀란 나는 네가 차려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지금 옆 동에 사는 둘째 누나가 밥을 해주러 오고 있다’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지. “네 누나는 무슨 죄니?” 우리의 통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가부장적인 조부모 때문에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했던 집안에서 4녀 1남 중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금보다 더 소중히 자랐고 그런 가족에게 질려버린 누나들은 그 영향으로 운동권에 몸담거나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입만 나불대는 페미니스트로 잘 지내고 있다. 한국 남자와 연애하기에 나는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출판사 에디터 E

 

 

넌 다를 줄 알았어

TV에서 ◯◯역 다리 아래에서 대낮에 여대생이 한 남자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저 여자가 남자였어도 저렇게 맞았을까? 무서워서 걸어 다니지도 못하겠어, 이제.” 그때 나는 그저 ‘화 나는 뉴스에 대한 옆 사람의 동의’ 정도를 얻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 남자가 정신질환자라는 것이다. 성별을 따질 것 없이 정신질환자의 범죄인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 “남자였으면 저렇게 때리지 못했을 게 분명한데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고 뭐야?” 내가 대꾸하자 남자친구는 비약이 심하다며 ‘남혐, 여혐 이런 거 불편하고 모두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주 평화주의자 납셨네. 그렇게 따지면 그 많은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큰 소리쳤지만 내 남자친구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후 우리는 술자리에서 걸핏하면 싸웠다. 남자친구는 점점 방어적으로 변해갔고 일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을 거론하며 그런 행동이 제정신이느냐고 따졌다. 그러면 나는 일베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고 너무 잦은 다툼에 결국 우리 둘 사이에 젠더 이슈는 금기어가 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얼마 전, 남자친구는 내게 <더 포스트>라는 영화를 추천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여성 이슈에 대해서도 잘 다뤘더라고. 너도 보면 좋아할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자신을 괴롭히는 여자 상사의 외모 지적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언제부턴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정도면 나 뿌듯해해도 되겠지? 일러스트레이터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