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선언적으로 다가오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총 80여 편의 작품으로 채운 최재원 시인의 첫 시집에는 ‘나랑 하고 싶은 게 뭐예요?’로는 도저히 전달될 수 없는 정서와 에너지를 자각하는 이의 실험으로 가득하다. 언어의 한계와 모순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는 사람, 언어를 고통스러워하고 끝내 사랑하는 이가 그럼에도 어떻게든 한뼘 더 나아가보려는 시도들이 시집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렇게 ‘말’은 그를 거치며 죽고 새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욕설과 사투리, 온라인 대화 메시지 등 경계를 가르지 않고 시 안으로 끌어들인 시어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사유는 찐득하게 얽혀 있다. 이 이상한 새로움의 근간을 굳이 찾자면 시인의 낯선 이력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최재원 시인은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이후 그림을 공부하고 미술 비평과 번역, 감수를 하며 인지와 감각의 내연을 확장해 온 이다.
첫 시집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로 제4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평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표현이 ‘과감하다’죠. 과감하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읽는 사람의 언어이고, 창작자 스스로 과감성을 인지하며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수상평을 듣고 기분이 어땠나요?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일이었어요. 감사하고요. 평소 글을 쓸 때 ‘과감해야지’, ‘깨부숴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내가 하려고 했던 말, 단어와 단어가 붙게 될 때 벌어지는 일, 혹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등 내가 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들에 관심이 가요. 몰랐 던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발견을 하고, 예상치 못한 것들이 펼쳐지는 상황들을 생각하며 쓰는 것 같고요.
“나는 꼭 이해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헤맴의 궤적을 통해서도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는 수상 소감이 왠지 오래 남더라고요. 헤맴의 궤적이 곧 쓰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작가에게 자유를 줬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해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가 하려는 말이 높은 곳에 있기에 이해하지 못할 것’이 라는 의미는 아니고요. 어릴 때부터 언어는 불투명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어떤 면에서 거짓 같고 모순을 너무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고통스 러웠고요. 이런 언어의 속성을 피하기 위해 물리와 수학을 공부한 것같고요.
명쾌한 세계. 네. 물리나 수학에서 수식을 쓰면 모두가 똑같이 이해하잖아요. 한데 언어는 동일한 단어에 대해서도 저마다 다르게 이해하고, 또 단어가 묶여서 문장이 됐을 때 그 순서에 따라서도 달리 이해하잖아요. 말은 곧 발화자의 표현인데 하려던 말과 실제 뱉게 되는 말이 다를 때도 많고요. 생각은 순서 없이 덩어리로 써 존재하는데 뭉게구름 같던 이 덩어리가 말로 나오게 되는 순간부터는 말에 차례가 생기고, 몸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 거예요. 마치 마요네즈 병 입구에 새겨진 모양에 따라 마요네즈가 별 모양도 되고 동그랗게도 나오는 것처럼요.
언어로부터 도망쳐 수학과 물리의 세계로 갔지만 언어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뭔가요? 물리나 수학이 어떤 면에서 명확하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것, 미지의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공식이나 패턴으로 끌어당기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지의 것을 내가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요. 그 과정을 겪으며 애써 도망쳤던 것들에 대해 이렇게 계속 도망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미술 비평을 쓰고, 한국 시를 번역하면서 언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도 깨닫게 됐고요. 막연히 두려워했던 것에서 가능성을 본 거죠. 뒤늦게나마.(웃음)
시집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척이나 쓰고 싶었던 사람, 써야만 하는 이의 글 같다는 거였어요. 그 말을 담당 편집자님에게도 들었어요.(웃음) ‘독자가 많이 고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몰랐는데, 맞아요. 아마 그 욕구가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책에 수록된 시 중에 ‘참수’라는 글이 있는데 목이 잘린 상황에서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닌 거예요. 나는 거기 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누구도 내가 거기에 있는 걸 모르는데 나는 그곳에 있는 거죠. 사라지지 않고. 그게 어떤 기분일까 상상하며 쓴 시예요. 상상과 기억은 유기적인 관계이기에 100% 상상이라고만 할 순 없겠죠. 상상이라는 건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고, 기억이라는 건 주로 과거에 대한 것인데 제 시에는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상황이 많은 것 같아요.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것을 모르거나 인정해주지 않을 때 기분이 어떨까.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할 때, 분명히 있는데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들을요.
그렇게 써냄으로써 해소되고, 가중되는 것이 있으리라 짐작돼요. 해소되는 것은 머릿속의 목소리, 소음들이 가라앉아요. 쓰는 동안에 오는 평화가 있어요. 가중 되는 것은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조형적인 부분들이 가중되는 것 같아요. 일단 뱉어 냈는데 ‘이 것이 과연 최선일까’, ‘어떻게 하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퇴고 과정에서의 가중이죠. 구성과 단어의 취사선택, 등장인물의 역할 등 논리적인 것들에 집중하게 되고요.
자유로운 형식에 대한 이야기도 많죠. 원고지 50매에 달하는 산문시부터 단 몇 행으로 끝나는 시도 있어요. 시인이 생각하는 시적인 것에는 최소한 무엇이 있나요?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혹은 익숙하다고 생각 했는데 그것이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시적인 것 같아요. 오늘 촬영장에서도 불이 다 꺼져 있는데 노란색 전선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 색의 대비처럼 문득 만나는 의외의 순간들을 시적이라고 느껴요. 외부적 요인 외에도 내부적으로 내 상태로 인한 인지 변화에도 관심이 가요. 열이 날 때, 술을 마셨을 때, 잠들기 직전 뇌가 훨훨 날아가는 것 같은 때처럼 예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예쁘게 보인다든지,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등 상태 변화 속에서 의외성을 발견하고, 평소의 방식과는 다르게 생각하게 될 때 글을 쓰고 싶다고 느껴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 격자에 맞추어 / 알아들을 수 있도록 / 찢어 떼어 놓는 데 쓰고 있다’ 수록된 작품 중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시를 쓰는 방식을 유추하게 되더라고요. 주로 어떤 언어를 찢고 떼어내 시 안으로 가져오게 되나요?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말, 특유의 말투나 표현 방식을 발견할 때 재미있어요. 시대마다 유행하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고등학교 때는 ‘막 이래’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부끄러움을 무마할 때 ‘막 이래’ 하잖아요.(웃음) 주위에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없으니까 친구들로부터는 시집에 대한 감흥을 들을 기회가 없고 심사평이 다였거든요. 한데 처음 본 댓글 중 하나가 ‘제목 실화냐?’예요. 제목은 ‘뭐에여?’인데 댓글로 ‘실화냐?’가 붙으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둘 다 비표준어이고 사전에 등재되지 않는 표현이잖아요. 사전에는 없지만 시대와 문화, 사회를 잘 표현하는 표준화 밖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것같아요.
맞아요. 제목이 주는 파격이 있죠.(웃음) 표제작은 어떻게 정한 건가요? 제가 먼저 제안했어요.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제목에 표준어를 쓰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표준어로 바꾼 ‘나랑 하고 싶은 게 뭐예요?’라고 표지 시안을 보여주셨어요. 논의 끝에 수정하지 않고 처음 정한 제목을 표지에 넣기로 했는데 막상 공개 전날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큰일났다. 이래도 되나.(웃음) 질러놓고 무서워서 다음 날 전화를 드렸는데 출판사에서 괜찮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미술 비평과 번역은 정확하게 옮기는 일이지요. 큰 맥락 안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옮기는 일이고요.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정확하게 닿으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시인이자 화가, 비평가이자 번역가 이 네 자아는 결국 다르면서도 같은 일을 한다고 느껴요. 그렇죠. 번역은 사회 지리적 언어, 출발어에서 도착어로 옮기는 과정이라고들 해요. 저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번역가라고 봐요.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는 과정이 번역인 것 같거든요. 그런 면에서 시를 쓰는 거나 번역하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불가능하지만 정확하게 닿으려 한다는 말을 하셨는데요. 저는 오히려 점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직선이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도달하기 위해 헤매는 과정 자체가 글인 것 같고, 시인 것 같아요. 그 발자국이나 궤적들이요. 그 자체가 의미이고요. 선별하거나 정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골프를 치는데 굳이 공을 홀에 안 넣고 돌아다녀도 그것대로 재미있잖아요.
풍경도 보고 바람도 느끼면서요.(웃음) 네. 굳이 골을 넣을 필요가 없는 골프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