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때부터 각본을 쓰기 시작한 수잔 랭동(Suzanne Lindon)은 영화 <스프링 블라썸(Spring Blossom)>을 통해 각본가이자 감독, 배우로서 그 면모를 톡톡히 보여주었다. 영화는 10대 소녀 ‘수잔’과 30대 남성 ‘라파엘’의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나이를 뛰어넘는 공감에 대한 이야기다. 숱한 로맨스영화에 나올 법한 격정적 포옹이나 키스 신은 없지만 수잔과 라파엘이 함께 추는 춤은 둘만의 애틋한 언어를 솔직하게 들려준다.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컨트롤한 수잔 랭동과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스프링블라썸 마리끌레르 영화제 mcff

 

극장에서 당신이 만든 영화 <스프링 블라썸>을 처음 본 날을 기억하나? 늘 가던 동네에서 내가 만든 영화를 보기 위해 티켓을 사는 일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만든 작품의 관객이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웠다. 배우가 되길 꿈꾸며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이야기를 눈앞에서 영상으로 보고 있으려니 대단한 일을 이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스프링 블라썸>은 평범하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나이를 초월한 사랑, 그 순수에 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 감정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러브 스토리 자체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에 더 관심이 있었다. 두 인물을 탐구하면서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극 중 10대 소녀 수잔과 30대 남성 라파엘 사이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서 둘의 나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 설정이었다. 둘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공유하며 아주 강렬하고 순수해진다. 이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다.

수잔이 석류 에이드를 하얀색 테이블에 일부러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영화가 출발한다. 이를 시작으로 붉은색이 영화 내내 자주 등장해서 중요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촬영할 때는 붉은색이 이렇게 큰 존재감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화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굉장히 의미 있게 부각됐다. 일반적으로 붉은색은 열정과 사랑을 상징하지만, 영화에서는 두 인물이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장치다. 수잔의 음료수나 헤어밴드, 라파엘이 일하는 극장을 전반적으로 붉게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일상적 장면, 평소에 두 인물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도 같은 색을 넣었다. 두 인물이 공통으로 느끼는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표현한다. 한편 좀 더 짙은 붉은색은 서로를 향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수잔과 라파엘이 함께 춤추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일상적 대화 도중 갑작스레 생경한 춤을 똑같이 추는 모습이 독특했다. 이 시퀀스는 영화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정확히 같은 동작을 취함으로써 둘만의 관능적인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라파엘을 연기한 배우 아르노 발로아(Arnaud Valois)와 나는 어느 때보다 멋진 팀워크를 자랑했다.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의 몸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의 춤을 만들어냈다.

 

스프링블라썸 마리끌레르 영화제 mcff

 

미성년자와 성인의 연애는 대체로 터부시한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으면서 특별히 신경 쓴 점이 있나?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육체적 관계를 묘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색다른 방식으로 관능을 표현하는 데 신경 썼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둘이 함께 춤추는 장면이다. 내게 이 영화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권태라는 감정을 공유한 두 남녀에 관한 영화다. 일상을 지루하게 느끼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자신을 재발견한다. 나는 금지된 사랑을 염두에 두지 않기에 이 영화에서도 금지된 것은 없다. 내가 수잔을 연기할 땐 오로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다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수잔을 둘의 관계에서 주도성을 띠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를테면 수잔이 원하지 않으면 라파엘의 스쿠터에 타지 않고, 먼저 사랑에 빠지고 먼저 사랑을 끝내는 것처럼 말이다. 로맨틱하고 정중한 남자그리고 강한 소녀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발견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존재론적 쓸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수잔이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거나 라파엘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화면이 자연스럽지 않고 매우 급작스럽게 전환된다. 일부러 엇나가는 상황을 연출한 것인지 궁금하다. 정확하다. 인물의 리듬을 영화의 리듬에 맞췄다. 수잔이 겪는 부자연스러운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관객이 보기에 거북할 정도로 매끄럽지 않게 연출했다. 때때로 새로운 사건은 고통을 안겨주고 그것에 직면한 인물은 막막하기 마련이다. 이런 감정을 영화의 리듬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도.

이 영화에는 동시대의 상징적 오브제인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현대무용과 연극, 오페라, 소설 등이 등장한다. 이상하게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대에 향수를 느끼곤 한다. 그 영향인지 영화에 현대적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클래식한 예술과 댄스, 오페라 등 순수예술에 매료되곤 하지만, 영화에서 의도한 바는 시대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시간을 초월한 장소에서 관객이 자신이 원하는 시간을 그리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특정 시대상이 드러나지 않고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스마트폰, 컴퓨터, 소셜 미디어 같은 것을 배제했다.

 

스프링블라썸 마리끌레르 영화제 mcff

 

영화, 미술, 사진 등 이 영화를 만들면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주기 바란다. 아주 다양한 것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여름휴가 때 혼자 할 일이 없어 따분한 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녹색광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들. 어린 시절 나의 삶을 바꿔놓은 클로드 밀러의 <귀여운 반항아>도 있다. <귀여운 반항아>는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첫 작품이자 내가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영화다. 클로드 밀러가 창조한 캐릭터는 나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수잔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매 순간의 감정을 제대로 묘사할 줄 아는 감독 피나 바우쉬의 영화는 그 어떤 작품보다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늘 영감을 준다.

머릿속에 오래 남는 대사가 많다. 그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사가 있다면? 첫째는 “나 어떤 어른과 사랑에 빠졌어”. 수잔이 엄마에게 자신의 겪은 일을 그대로 말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다. 둘째는 “나는 또래 아이들이 따분해요”. 수잔이 라파엘에게 한 말로 <스프링 블라썸>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표현이다.

영화를 직접 만들겠다고 처음 생각한 때는 언제였나? 원래 꿈은 배우였다. 부모님이 두 분 모두 배우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일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의 이야기로 내 역할을 써보자는 결심이 섰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능할 줄은 몰랐다. 부담 없이 일기를 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러던 중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미장센이 마구 떠올라서 직접 연출하기로 마음먹은 시기가 있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를 직접 연출하게 된 것은 필연인 것 같다. 내겐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배우와 감독 모두를 온전히 해내는 것만이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됐다.

 

스프링블라썸 마리끌레르 영화제 mcff

 

그간 나이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해낸 일에 대해 경이롭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고. 이런 반응을 접하면 어떤가? 소위 어리다는 것, 젊음에 대한 사회 통념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나? 이번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인 ‘젊음’이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간 것 같아 기쁘다. 젊은 사람들은 매우 대범하고 할 이야기가 많다. 사회, 예술, 사랑 등 삶에 대해 우리 세대가 지닌 인식에 긍지를 느낀다. 사람들에게 나이와 야망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나는 동갑내기들과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반면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과 있을 때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사람들이 출신 배경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을 믿길 바란다.

열여섯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을 비교할 때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있나? 사랑은 언제나 미스터리다. 사랑에 빠질 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인식하기 때문에 나 역시 미스터리의 영역에 있는 셈이다. 첫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매우 특별하고 살면서 여러 번 느끼지 못하는 감정이다. 그때는 사랑의 감정에 온통 사로잡혀 몽상가가 되고 일상은 물론 마음까지 노예가 돼버린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첫사랑이 지나갔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봄이 오는 3월, 제9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당신의 영화를 상영한다. 어떤 마음을 보내고 싶은가? 굉장히 자랑스럽고 흥분된다. 이번 영화제는 내 영화가 또 한 번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임을 확인하는 자리이기에 더없이 뿌듯하다. 나와 다른 환경에 사는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이 마음을 만끽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