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회 칸국제영화제

©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 Jim Carrey, The Truman Show by Peter Weir / Graphic Design © Hartland Villa

축제의 막이 제대로 다시 올랐다. 2020년 개최 무산, 2021년 약식 개최를 선택했던 칸영화제는 3년 만에 정상 개최를 선언했다. 현장은 전 세계에서 날아온 스타들과 취재진, 마켓 관계자들, 관객들로 연일 붐비고 있다. 올해의 공식 포스터는 피터 위어 감독 연출작 <트루먼쇼>(1998)의 한 장면. 이는 공통의 경험이 가로막혔던 지난 2년이 하나의 꾸며진 쇼처럼 비현실적이었다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세상의 끝이라 믿었던 곳의 계단을 오르며 용기 있게 진실을 대면하던 트루먼(짐 캐리)처럼, 축제에 모인 사람들은 레드 카펫이 깔린 뤼미에르 대극장의 계단을 오르며 영화라는 세계를 다시 마주하고 있다.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Christophe Bouillon / FDC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Christophe Bouillon / FDC

영화제가 열리는 크루아제 거리가 예년과 비교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라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거대하게 자리 잡은 숏폼 비디오 어플 틱톡(TikTok)의 광고판과 배너를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틱톡이 올해 영화제의 공식 파트너사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풍경일지 모른다. 다만 그간 스트리밍 기반 플랫폼 제작 작품들에 전혀 관대하지 않았던 칸의 보수적 태도를 떠올리면, 분명 놀라운 변화다.

올해 칸영화제 틱톡 공식 계정(@festivaldecannes)에서는 레드 카펫의 독점 라이브 콘텐츠와 인터뷰 등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다. 축제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기술 방식과 손잡는 동시에 젊은 관객층을 유입하려는 칸의 열망과, 전 세계 영화 관계자들에게 플랫폼의 새로운 가능성을 알리고 싶은 틱톡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풀이된다. 공식 경쟁 부문과는 별개로 글로벌 경쟁 프로그램인 틱톡 단편영화제(#TikTokShortFilm)도 신설됐다. 30초에서 3분 사이의 초단편 출품작들 중 수상작을 가려 각각 1만 유로, 5천 유로의 상금을 수여한다.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FDC

디지털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칸영화제의 변화는 예매 시스템에서도 감지된다. 공식 상영 티켓 소지자 혹은 뱃지 등급별 순서대로 입장하던 전통적 방식이 지난해부터 온라인 사전 예약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취재진에게도 예외 없는 일괄 적용이다. 상영 4일 전 아침 7시에 예매창을 여는 시스템으로, 전 세계 취재진은 매일 아침 수강 신청에 버금가는 ‘피켓팅’을 치르는 중이다. 영화제 초반 서버가 여러 차례 다운되면서, 트위터를 포함한 소셜미디어에는 예매 시스템의 불편함을 토로하는 각종 밈이 쏟아지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화려한 축제 무드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비경쟁부문 초청작 <탑건: 매버릭>은 오히려 개막작 <파이널 컷>보다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무려 35년 만의 속편으로 돌아온 항공 액션 블록버스터의 전설을 환영하듯, 칸영화제는 18일 오후 열린 공식 상영에 앞서 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에어쇼를 선보였다. 상영이 끝난 직후에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영화제의 밤을 수놓았다. 1992년 제45회 폐막작이었던 <파 앤드 어웨이>로 영화제를 찾은 이후 30년 만에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은 배우 톰 크루즈를 향한 역대급 환대이자 확실한 ‘스타 모시기’ 퍼포먼스였던 셈이다. 톰 크루즈는 올해 명예 황금종려상(palme d’or)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헌트 이정재 정우성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헌트 이정재 정우성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제 초반 스타 파워를 증명한 또 하나의 작품은 19일 밤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을 통해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가진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을 통해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한 그를 향한 뜨거운 관심은 현지에서도 충분히 감지될 정도였다. 1983년 안기부 요원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남파 간첩 총책임자를 좇으며 가려졌던 진실과 마주하는 첩보 액션으로, <태양은 없다>(1999) 이후 이정재와 정우성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한 것으로도 화제다. 존 르 카레가 쓴 첩보물과 마이클 만의 액션 영화 사이를 지향한 작품 같다는 것이 <헌트>가 남긴 첫인상. 198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을 적극적으로 가져온 시대 배경 안에서 두 주인공 사이의 갈등과 총격 액션에 방점이 찍혀있다.

축제의 한가운데에서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중대한 이슈다. 17일 개막식 현장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으로 깜짝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를 언급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영화는 침묵해선 안 된다”는 발언으로 영화인들의 관심을 촉구했다. 올해 칸영화제 측은 러시아 공식 대표단을 초대하지 않는 것으로 우크라이나 지지 의사를 명확하게 표명한 상태다. 경쟁부문 상영작 중 하나로 러시아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있지만, 그는 현재 러시아를 탈출해 독일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쟁부문의 강자 <헤어질 결심>의 등판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한편 총 21편의 경쟁부문 상영을 둘러싼 초중반 분위기는 미지근했다. 이렇다 할 화제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22일까지 공개됐던 작품 중 가장 높은 데일리 별점을 기록한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아마겟돈 타임>. 4점 만점 중 2.8점을 받았다. 감독이 1980년대 뉴욕 퀸즈를 배경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반영한 성장물이라는 점에서 <벨파스트> 등의 영화와 유사점을 갖는다. 카메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이 숨 쉬고, 인종주의와 홀로코스트가 남긴 과거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시대의 한복판에서 소년 폴(뱅크스 레페타)이 통과하는 시간들을 담는다. 안소니 홉킨스, 제레미 스트롱, 앤 해서웨이가 각각 폴의 할아버지와 부모를 연기하며 영화의 세계를 깊고 풍성하게 완성했다.

가장 적극적인 관객 반응을 이끌어냈던 작품 중 하나는 <더 스퀘어>로 2017년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던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신작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다. 인플루언서와 패스트패션에 무지성으로 열광하고, 병적인 미의 기준과 자본이 모든 걸 해결하는 시대를 비웃는 블랙 코미디다. 초호화 유람선이 난파된 뒤 살아남은 승객과 승무원들 간 계급 / 계층 피라미드가 거꾸로 뒤집히면서 기상천외한 상황들이 펼쳐진다. 인간 사회의 위선을 꼬집는 날카로운 유머 감각은 어느덧 외스틀룬드 감독의 장기로 확실하게 자리 잡은 모양새다.

<경계선>(2018)이라는 초현실적 상상력의 세계를 선보였던 이란 감독 알리 압바시는 스릴러 장르 공식에 충실한 신작 <홀리 스파이더>를 선보였다. 2000년~2001년 이란 테헤란에서 성매매 여성 16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에 관한 이야기로, 그를 법정에 세우려는 여성 저널리스트의 추적극이기도 하다. 영화는 신의 이름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과 그를 추대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아이러니, 지성적 반성이 없는 사회적 인식의 대물림 과정을 서늘하게 제시한다.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헤어질 결심 탕웨이 박해일 박찬욱 감독

탕웨이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헤어질 결심 탕웨이 박해일 박찬욱 감독

박해일

그리고 영화제 7일차인 23일 저녁 6시, ‘마침내’ 분위기를 반전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공개된 경쟁작 중 유일하게 데일리 평점 3점대(3.2점)를 받았다. 한 남자가 추락해 사망한 산꼭대기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만조의 바닷가를 오가는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세계를 구성하던 파격과 폭력을 걷어내고 애수와 회한을 얹은 멜로다. 동시에 색다른 탐정 수사물의 무드를 띈 작품이다. 살해 용의자와 담당 형사로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는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은 그 관계 설정만으로 이미 미묘한 자장 안에 있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마주하는 취조 장면은 심문이라기보다 궁금한 상대를 향한 깊이 있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 가깝다. 사건 현장은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리는 일종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은 “한 개인의, 나아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서 사랑이라는 감정과 멜로의 장르성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 안에서 사랑은 그리 간단하고 또렷하게 제시되는 감정이 아니다. 감독에게 모티프를 제공한 노래이자 극 중 삽입곡인 정훈희의 ‘안개’ 가사처럼,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의 모호한 풍경 같은 것에 가깝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사건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현장을 치워놓는 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단순한 증거 인멸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고 인식하는 순간, 또한 그 사람을 떠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은 언제일까. 무엇이 그 결심과 확신을 추동할까. 감독의 전작 <아가씨>(2016)의 숙희(김태리)는 히데코(김민희)를 망치러 온 구원자였지만, 서래는 해준을 그저 망쳐버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 같은 감정에 빠져버린 해준은 말한다. “나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제 75회 칸국제영화제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

<헤어질 결심>을 ‘어른의 사랑’에 빗댄 감독은 24일 한국 취재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인물들이 속마음을 감추는 장면이 많다. 대사가 적지 않은 영화지만 그 속뜻을 하나하나 파악하려면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이어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넘나들며 인물들이 주고받는 언어의 뉘앙스, 말의 맛이 살아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번에 영화제에서 상을 못 받는다면 (외국 관객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 때문일 것”이라던 감독의 발언이 그저 농담으로만은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경쟁부문 상영작 전체가 모두 공개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쇼잉 업>, 클레어 드니 감독의 <스타즈 앳 눈> 등의 기대작들이 줄줄이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황금종려상의 행방을 가리기 위한 흥미진진한 막판 레이스는 이제 막 본격적으로 달궈지는 참이다. 영광의 주인공은 오는 28일 폐막식 현장에서 공개된다.